<감삼다이어리>는 일상에서 마주한 감사함을 때로는 진솔하게, 때로는 sarcastic 하게 풀어내는 콘텐츠입니다.
30년 넘게 한 회사에 근속하신 엄마 친구분께서 회사와의 헤어짐을 선언하셨고, 엄마와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 퇴직 파티를 떠났다. 목~금으로 이어지는 1박 2일간의 일정이었으나 금요일 저녁, 엄마는 단골 곱창집에 온 듯이 "1박 추가요!"를 외쳤다. '그래, 우리 엄마 한창 친구 좋을 나이지.'라는 발칙한 생각과 함께 맞이한 토요일, 잘 놀다 왔냐는 가족들의 물음에 엄마는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고가 났어."
어딜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비가 눈으로 바뀌었고, 그 눈은 바닥에 닿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얼어붙은 게 화근이었다. 말로만 듣던 블랙아이스가 엄마에게 찾아온 것이다. 견인차가 왔다고 하니 분명 가벼운 사고는 아닐 텐데, 얼마나 망가졌냐는 질문에 엄마는 빙판길보다 더 꽁꽁 입을 다문채 방에 들어가 버렸다.
어떤 문제를 정면돌파하기보다는 관망하거나 회피하려는 엄마의 성향이 또 발현된 것 같아 나도 신경을 쓰지 않고 싶었다. 어쨌든 인사사고가 발생한 것은 아니기에 문제 될 것 없다는 마음도 있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철이 든 건지 직감이 발현된 것인지 괜히 엄마를 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을 여니 엄마는 섬집아기처럼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혹시 우나 싶어서 들어왔지?"라는 말을 건네자마자 엄마는 눈물을 터뜨렸다.
"차가 많이 다쳤어."
엄마는 정말 서럽게 엉엉 울었다. 전국팔도 산이란 산은 모두 다 찾아다니기에 지형과 날씨에는 도가 튼 사람으로서, 친구들에게 조금 빨리 출발하자는 말을 건넸으나 오랜만의 외출에 다들 신이 난 나머지 이곳저곳을 들르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카페만 안 갔다면, 아니 그냥 원래 일정대로 금요일에 출발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자책을 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should have pp 화법을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 순간 만큼은 나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었다. 엄마의 서러움은 사고 그 자체에 대한 것이나 사고 수습에 드는 비용과 불편함, 이후 보험값 인상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십여 년 만에 바꾼 차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 똥차' 좀 바꾸라고 할 때도, 탈 수 있을 만큼 타고 바꾼다고 버티던 엄마가 장고 끝에 뽑은 새 차. 엄마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새 차가 나오는 날을 기다렸다. 퇴근 후 일상 대화를 나누던 도중, 차량 인도금을 낸 순서대로 먼저 출고가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나는 큰 고민 없이 엄마에게 돈을 송금했다. 확실한 건 사달라는 뉘앙스를 비쳤다거나 먼저 돈의 디귿자라도 꺼냈다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이라는 거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거야 뭐 일 좀 더 하면 되는 거고 기다림의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차는 어차피 소모품이고 사는 순간 중고다, 감가상각이라는 게 어쩌고 하는 식의 정 떨어지는 말을 내뱉으며 뚝딱거렸지만 엄마의 마음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어디 긁히기라도 할까 애지중지 다뤘던 차가 한 순간에 너무 크게 망가져버린 걸 보는 순간 엄마도 같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거다. 다행히 엄마는 그날의 슬픔을 김치찌개와 소주 한 잔에 털어 마시며 금방 회복했고, '그래 이게 우리 엄마지.' 하며 안도했다.
이번 경험의 감사함은 세 가지다.
1.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
2. 1월이 아닌 12월에 벌어진 사고라, 새해 액땜 미리한 셈 칠 수 있다는 것
3. 아파트 주차장에 본인 차를 가져다 두며 "나 다음 주에 차 안 쓰니까 이걸로 출퇴근해~"하는 친구가 엄마 곁에 있다는 것
이번 일을 계기로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더해졌을 것이고, 비나 눈이 오는 날에도 주저 없이 산행에 나서는 엄마가 이제 두 번 세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행스럽기도 하다.
한 해의 끝을 임팩트 있게 마무리한 만큼, 2024년의 엄마가 올해보다 더 건강하고 즐겁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