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자살'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둘째 언니와 심하게 다투었고 절망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 죽기'라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벅찬 생각에 빠져 들었다. 나는 카세트테이프에 유언을 녹음하면서 펑펑 울었고, 그러면서 절망의 구덩이에서 조금씩 빠져나와 다행히(?) 극단적인 선택 시도까지는 하지 않았다.
항상 날 심적으로 괴롭혔던 모든 것은 사람이었다. 가정은 가장 작은 사회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태어난 지 몇 해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의 사회에서 따돌림당했고, 그들에게 비웃음 거리였다. 딸만 셋이었던 우리 집은 언니들 둘이 똘똘 뭉쳐 나를 외톨이로 만들었고 엄마아빠는 일을 하느라 그런 우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기억의 조각이 낡고 부서져 지금까지 남은 게 별로 없는 세 살 때, 영화의 필름처럼 한 순간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언니들은 날 방에 가두고 문을 잠근채 피아노의 제일 낮은음을 쳐 둥둥 울리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거나, 귀신 소리를 냈다. 공포에 질린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집에는 우리 셋뿐이었고 그 순간만큼은 언니들은 나에겐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은 또다시 그들이 날 방에 가두고 괴롭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무섭고 두려운 나머지, 조심스레 집을 빠져나와 뒤도 안 돌아보고 미친 듯이 뛰어 한 집 건너 있는 이웃 할머니 댁으로 갔다. 그때 할머니 댁 현관문을 두드리면서 나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아무도 날 따라오면 안 돼. 할머니, 빨리 문 열어 주세요......!' 나는 종종 할머니 댁으로 숨어들었는데, 이상하게도 할머니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 책을 읽어줬는지 아니면 맛있는 간식을 주셨는지,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절박하게 현관문을 두드리던 순간만이 뇌리에 남는다.
아빠는 폭력적이었다. 욕도 잘했고, 잠잠하다가도 다시 무자비하게 엄마를 때렸다. 집안 집기들이 부서졌고 엄마는 가끔 집을 나갔다. 다툼이 있었던 다음날,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나와 언니들은 우산을 쓰고 나가 밖으로 던져진 그릇들 중 다시 쓸만한 것들을 골라 집으로 가져왔다. 아빠는 우리들에게는 자주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는데, 딱 한 번 아빠에게 이단 옆차기(!)를 당한 적이 있다. 일곱 살 때, 둘째 언니와 장난을 치다가(그들이 항상 나를 괴롭히는 건 아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언니는 문을 두드리며 당장 열라고 외쳤고 나는 버텼다. 그때였다.
" 아빠, 허공나가 화장실 문 잠그고 안 열어요!!!"
언니는 아빠에게 고자질하는 것으로 우리의 장난을 종료하고 싶었나 보다. 아빠는 화장실 문을 쾅쾅 두드렸다.
" 허공나! 문 열어!"
나도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문을 열기 싫었다. 몇 번이나 계속되는 아빠의 외침에도 나는 꿋꿋이 버텼다.
" 씨팔, 안 열어?"
아빠가 욕을 뱉었다는 건 기분이 무척 안 좋다는 뜻이었다. 난 겁에 질려 문을 열고 나갔고, 아빠는 도움닫기까지 해가며 날아오르더니 두 발로 내 배를 날려버렸다. 나는 힘없이 쓰러졌고 비척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게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방 문 틈 사이로 그런 나를 지켜보는 두 언니들이었다. 그들은 웃겨 죽겠다는 듯 큭큭거렸다. 나는 이단 옆차기를 한 아빠도 아빠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 딱하다는 감정보다 우습다는 감정을 느낀 그녀들이 죽도록 싫었다.
차곡차곡, 한 겹 한 겹 쌓인 내 상처는, 모두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가족들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속해있던 사회, 가정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했다. 조현병 발병 전까지, 나는 그들을 참 많이도 미워했다.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싶을 정도로.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의 상처도, 모두 사람이었겠지. 누구에게나 그러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