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재료이다.
1. 가끔 식품 회사들과 미팅할 기회들이 생긴다. 이야기를 오래 나누다 보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실적이었다. 어찌 탓할 도리는 없다. 좀 심하게 묘사하자면, 회사의 입장에서 음식이란 소비자들이 식탁에 머리를 숙이고, 입에 넣는 반복된 행동을 하는 복종해야 할 대상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음식이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넘어, 의미 부여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하고 싶었으나, 아마도 그 누구도 귀 기울지 않을 것이다.
2.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가끔 고래 고기를 사 오셨다. 그리고 그날은 부산항 근처로 외근을 나가신 것이 분명했다. 소매 끝에 굽 굽 해진 소금 냄새와 함께 들려온 거칠고 누런 재생 봉투는 이미 고래기름 때문에 검고 투명하게 녹아 있었다. 봉투의 입을 열지 않아도, 종이와 고래기름이 뒤섞여 미묘한 향기로 그 자백을 받아 낸 듯 말이다.
3. 고래 고기는 부위별로 육지에 살고 있는 모든 고기의 맛과 향을 담고 있다고 했다. 사실 육지 고기를 모두 먹어보지 못한 어린 내가 그 맛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지만, 한 입에 넣기에도 두툼하게 썬 살코기와 붙어 있는 지방 사이로 배어 나오는 고래 고기 특유의 향기는 기억 어딘가에 치환되어 남아있다, 가끔 다른 맛을 음미할 때 희미하게 살아나곤 했다.
4. 이제는 시나브로 고래 고기 기억이 난다. 뭔가를 먹고 있지 않아도 말이다. 어쩌면 고래 고기는 내 기억을 열고 들어가는 열쇠쯤일 거다. 그 덕분에 오랜 시간 작동을 멈췄던 오감이 재생되기도 한다. 펼쳐지는 후각과 미각 이어서 짙푸른 부산, 히멀건하셨던 아버지, 그 뒤로 소금 장을 만드느라 진지하셨던 어머니. 그 시간의 추억이 깜짝할새 밀물처럼 들이닥친다.
5. 마르셀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과 홍차”에 대한 회상 대목은 꽤 유명하다. 주인공은 마들렌과 홍차로부터 시작된 추억에 대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라고 표현했다. 이후 세상은 이를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르기로 한다.
6. 정해진 음식만 그런 것은 아니다. 본래 모든 음식에는 기억을 만들어 내는 DNA가 저장되어 있다. 우리가 먹고사는 것만큼 원초적인 것이 있을까. 그 원초적인 욕망과 원시적인 행위의 것이 서로 끌어당길 때 우리의 감각과 기억은 고래기름처럼 검고 투명하게 더없이 깊어진다.
7. 음식은 기억의 공간을 만드는 재료 그 자체다. 우리 기억에서 유영하는 고래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 신비하고 노래하고, 독특한 맛과 향에 젖게 되는 것, 그것들이 지금의 우리를 있도록 해낸 것처럼 말이다. 문득 갓 6살이 된 내 딸아이는 한참 뒤 어떤 음식을 추억할지 궁금해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