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의 불편함, 몸에 젖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욕망은 우리에게 내재화되고,
우리에게 남은 건 '을'의 비극만 있을 뿐이다.
현대판 계급투쟁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
이념적이다. 직접적이다. 하지만 세련되다.
불평등을 이야기하면서 어떠한 지적 유희도 없이
감각적으로 감정을 파고든다.
영화는 사회적 모순을 이야기한다. '기생'이 아닌
밝은 생을 바라기에 이념적이고,
시각적 대비로 불평등의 슬픈 감정을
건드리기에 직접적이며,
독특한 상상들이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로 만들어지기에
세련되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고 찬사를 보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불편함을 말한다.
왜 그럴까? 필연적 비극의
자화상을 비추기에 그러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물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적당한 양의 물은 기쁨이자 축복이지만
넘치는 물은 재난이다.
그것도 약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재난.
영화 초반 반지하 집 앞,
노상방료를 하는 취객에게
물을 뿌리는 모습은 행복 그 자체이지만
극 후반 퍼붓는 장대비는 재앙일 뿐이다.
'을'에게는 이다지도 가혹한 물이지만
'갑'에게는 계획된 캠핑의 취소일 뿐이며
오히려 내일의 화창한 날씨를 약속한다.
부자가 되고 싶은 '을'의 욕망은 커지기만 하지만
그러한 욕망이 커질수록
더욱 슬픈 비극이 될 뿐이다.
송강호(기택)의 장남 이름은 '기우'이다.
기우제 할 때 기우이다.
비를 바라는 마음.
기택 가족에게 비극의 씨앗이자 출발이기도 했다.
'기우'의 친구는 따라 하고 싶은 대상이다.
좋은 집안, 좋은 대학, 멋진 자신감.
친구가 취객에게 호통치듯이,
기우는 물을 뿌리고,
친구가 과외 학생을 좋아하듯이,
학생과 사랑을 나눈다.
그런 친구가 선물로 수석(水石)을 가지고 온다.
무언가 굉장히 인공적인
이 돌은 물을 뿌려줘야 생명력을 발휘한다.
'기우'가 위조 증명서를 들고나갈 때
엄마'충숙'이 물로 돌을
닦고 있는 모습을 상기해보자.
우연히 극 설정에 들어온 수석(水石)은
극 후반부로 갈수록 의미의 비중이 커지고
'기우'가 필연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끌어 앉는 존재가 된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의 '기우'에게
돌은 필연적이었다.
침수된 집에서 물을 흠뻑 먹은 수석(水石)은
기우의 눈앞에 떠오르고
돌을 끌어안은 '기우'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돈에 죽고 죽이는 인간사가 오버랩된다.
자본주의 = 물, 돈 = 돌(水石)
송강호(기택)의 가족 몸에서는
반지하 곰팡이 냄새가 난다.
주어진 환경이 부여한 계급 표식이다.
노력한다고 바뀔 수 없는 몸에 각인된 채취.
동물은 서로를 냄새로 알아본다.
부자 이선균(박사장)은
동물적 감각으로 기택과 자신을 구별 짓고,
기택은 자신과 다를 바 없이
부인과 동물적 교감을 나누는
오히려 더 저속하게 나누는
박사장을 감내한다.
그런 기택에게 박사장이 한
살인자의 피 냄새에 코를 막는 제스처는
살인범과 자신을 동일하게 구별 짓는
모욕일 뿐이었다.
박사장의 아들은 인디언 놀이를 좋아한다.
송강호(기택)의 집이 물난리로 침수되고 있을 때
방수가 되는 천막으로 인디언 집 놀이를 한다.
박탈된 자에게는 인디언 복장이 분노의 표식이지만
가진 자에게는 유희의 놀이일 뿐이다.
지하 기생 인간을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은
박사장 가족 중 아들뿐이다.
귀족집 자제들이 으레 그러듯이
박사장 아들은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하다.
그런 감수성이 누군가를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감인지
지하 기생 인간은 도와달라는 모스 부호를 보낸다.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주인?(박사장)에게
Respect를 외치는 거지근성.
또 다른 모스 부호를 보내는 자는
송강호(기택)이다.
수신자는 자신의 아들(기우).
실패하는 계획이 두려워
삶의 충동으로만 사는 기택의 희망은
계획하는 인간 기우이다.
그의 영화 마지막 계획은
부자가 되는 것이고 상상으로 마무리한다.
앤딩 장면에 관객은 씁쓸하다.
기우가 평생 급여를 모아도 그런 집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관객들은 알기에.
선명한 대비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파고든다.
반듯하고 넓은 언덕 위의 집
침수되고 냄새나는 반지하 집.
항상 계단을 오르는 자
항상 계단을 내려가는 자.
밝은 공간
어두운 공간.
비를 맞으며 집으로 퇴각하는
송강호(기택) 가족의 모습은 흡사
도시의 쥐떼 또는 바퀴벌레 같다.
비하가 아닌 처량함이다.
인간이면 다 같은 인간이지 뭐가 다른가.
여유 있는 자는 소고기를
넣냐 안 넣느냐의 다름이지
똑같이 짜파구리를 좋아하는 인간이지 않나.
최고 권위의 상을 타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한국 관객들은 외면할 것 같다.
보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나체로 길거리를 활보하면
수치심과 불쾌함이 들듯
자신의 욕망이 위선을 벗고
이야기로 춤을 추면 부끄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