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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준호 Aug 19. 2019

[지구 최후의 밤] 장면별 해석

사랑, 허상과 환상인 사랑


놀랍도록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며,

놀랍도록 예술적인 영화이다.

내 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영화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만,

몽환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어 환상에만 취해

이야기의 혼돈에 몰아넣어질 감상자들에게

도취의 황홀경을 선사하고 싶다.

가슴에 사랑의 의미가

커다랗게 새겨지는 그런 도취를...


내용도 사랑, 형식도 사랑인 영화이다.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 무엇이냐 물으면

추상적인 형용사의 나열일 뿐이다.


꿈을 꾸는 듯한,

하늘을 나는 듯한,

멀미가 날 정도의,

세계가 빙빙 도는,

영원할 것 같은 찰나,


이 모든 형용사들이 영화라는 허구 속에

사실 같은 이야기로 채워지고

사랑이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체험이자 기억이라면

이 영화는 시종일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과거의 여자를 잊지 못하는 남자.

다른 여자의 몸을 탐닉하여도

기억과 꿈의 경계 속에

그녀의 존재는 아로새겨져 있다.


자몽을 좋아하는 그녀.

한여름 우연히 만나

남자는 필연적으로 그녀에게 끌리고,

남은 모든 생은 그 필연 속에 엮어지게 된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온 그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분간되지 않는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를 찾아 나선다.


영화는 크게 1막과 2막으로 나누어진다.


현실에서 스러져가는 기억을 더듬으며

몽환 속에 그녀를 갈구하는 남자.


무의식의 심연에서 현실로,

발광하는 꿈과 같은 현실로 길어 올려지는 남자.





얼굴 없는 사진


죽은 친구의 복수를 위해

완치원(탕웨이)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필연적으로 끌리게 된다.

무엇이 필연이었을까?

남자에게는 죽은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이 있고

어머니 얼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쫓아가는 그는

그녀에게 구애한다.

'내가 아는 사람을 닮은 것 같다.'

흔한 작업 멘트와 함께 얼굴 없는 사진을 보여준다.

얼굴도 없는데 화장이 번진 것도 닮았다고 한다.


우연 속에 엄마와 아들이 되고

남자는 엄마의 이미지를

기억 속에 모상(模相)으로 사랑하게 된다.

우연히 만난 그녀는 얼굴도 잊혀가는

이 모상을 닮았고 필연이 사랑으로 이끈다.

사랑이 지나가고 그의 기억 속에

완치원(탕웨이)의 이미지는 모상으로 남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얼굴은 흐릿해지지만,

점멸해가는 기억을 붙잡으며

그녀를 찾아 헤매는 남자.

그녀에 대한 기억은

남은 생에 필연으로 놓이게 되고

남자는 그녀를 닮은 여자를 찾아낸다.


남녀의 사랑은

그녀와 그의 존재 자체가 아닌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기억을 사랑하는 것인가...

그렇다 해도 사랑은

너무나도 달콤한 꿈이다.





자몽과 사과


자몽을 좋아하는 그녀.

남자의 구애에

'지금 이 순간 구하기 힘든 자몽을

구해 오면 받아주겠다고 한다.'


누군가와 인연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희박한 확률의 도박.

연인이 된다면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자몽을 먹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


뜨거운 여름의 열정에 장마가 드리 붓는다.

남자는 겨울의 과일 사과를 먹는다.

그것도 씨까지 먹는다.

때를 만나지 못한 과일을 먹는 것도

예외적이고 씨까지 먹는 것도 이상하다.

시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그는 다시 예외적으로 씨까지 사과를 먹는다.

그녀를 닮은 그녀와 함께.

오락기기에서 자몽이 당첨되어 희망이 부푼,

그녀를 닮은 그녀와 함께.





탁구 아이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며

남자는 지하갱도로 내려가게 된다.

그 속의 집속에는 귀신인지 모를 아이가 있다.


완치완(탕웨이)와의 사이에

태어날 수도 있었을 아이는

남자의 무의식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다.


그녀와 사랑을 속삭이며

아이에게 탁구를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의 회한은

아이와 같이 꽁꽁 숨어 있었고

보이기 싫어 동물의 가면까지 쓰고 있었다.


아이는 완치완(탕웨이)를 기억하게 하는

초록 코트를 남자에게 건넨다.

무의식에 남은 차가운 이별의 슬픔을 견디고

현실로 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이.


살아 있었으면 죽은 친구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을 아이의

길 안내를 받아 무의식 속 심연의 골을 건너

현실로 돌아오는 남자.


그와 그녀 사이의 무의식 속 존재일

아이는 남자를 심연의 골을 건너게 해 주며

그녀를 닮은 여자에게로 가는 매개체가 된다.





하늘을 나는 환상


추상이 영화 속에서는 환상적 현실이 된다.

무의식 속 아이가 건네준

탁구채와 주문을 믿으니

사랑의 황홀경이 시작되고,

완치완(탕웨이)가 초록 책의 주문을 믿으며

사랑을 꿈꾸었듯이,

사랑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이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을 하게 되면

꿈에 취하고,

하늘을 나는 것 같으며,

멀미가 날 정도로,

나와 그녀를 중심에 두고

공간이 빙빙 돌기 시작한다.





과일을 실은 놀란 말


하늘을 날다 내려온

그녀와 그의 인기척에

놀란 듯 말은 날뛴다.

동물은 귀신을 보고 놀란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사랑하는 둘.

무의식의 발로일 수 있을 허상.

일명 콩깍지





불과 빨간 머리


빨간 머리 염색은 미침의 상징이고

미친 여자의 연애시절 꾸민

자신의 집에 대한 방화는

모든 과거와의 단절이다.


제삼자로 주변 환경일 뿐인 주인공은

떠나려는 미친 여자의 남자에

총을 겨누며 여자를 데려가라고 강요한다.


꿈과 환상이 끝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현실에서 남자를 따라가려는 미친 여자는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는 주인공에게

시계를 건넨다.





시계와 폭죽


시계는 영원이고 폭죽은 찰나이다.

미친 여자의 사랑의 끝은 폐허였다.

강요당한 남자와의 동행이었다.

건네진 시계에 담긴 그녀의 행복했던

사랑의 기억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목도하였음에도

주인공 남자는 사랑이 시작된

그녀에게 돌아간다.

시계를 주며 영원을 기약하고

발광하는 폭죽은 찰나의 환상을 의미한다.





마무리


주문을 외워라.

사랑에 대한 믿음이

그녀와 나를 도취시키고

하늘을 날게 해 준다.

사랑의 끝이 폐허여도 상관없다.

사랑의 본질이 허상이고 환상 이어도

상관없다.

그녀와 내가 키스하는 순간은

영원한 찰나가 될 것이고

주문을 외운 대로 모든 것은

우리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 것이다.

환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환상이 되는 그 순간!


영화 '지구 최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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