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32일차, 요르단 여행 2일차
보통의 점심시간보다는 조금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산길을 오르기 전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숙소에서 사서 가지고 온 런치박스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뒤 당나귀를 타고 올라가라는 수많은 무리들을 헤치고 마침내 계단 앞에 섰다. 고생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페트라에서 딱 두 가지만 봐야 한다면 그중 하나는 단연 알 카즈네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저 계단 너머에, 산의 정상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알데이르로 올라가는 계단은 굉장히 힘들었지만 발 밑으로 펼쳐지는 장관을 보면 피로가 순식간에 가시는 기분이다
처음에는 할만하다, 하면서 올랐는데, 이게 정말 쉬는 구간 없이 계단 계단의 연속이었다. 단순 산행보다 계단행(?)이 힘든 이유였다. 허벅지는 터질 거 같고 햇빛은 내리쬐고 카메라와 가방이 점점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건조한 날씨 때문에 땀이 나지 않은 것이 유일하게 다행이었다. 계곡의 형세 탓인지 바람도 많이 불지 않아 몸속에 열이 갇혀있는 기분에 점점 힘이 들었다. 물론 올라가지 못할 계단은 아니었지만 순간 당나귀꾼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래도 당나귀도 사람을 이고 올라가려면 힘들겠지.
30, 40분 정도의 산행 끝에 더 이상 봉오리가 보이지 않는 마지막 계단에 접어들었다. 직감적으로 이곳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우리의 예상대로 더 이상의 계단은 없었다. 넓은 뜰이 등장했다. 계단의 건너편에는 음료와 물 담배를 파는 휴식처가 있었는데 의자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해 놓아져있었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벽 너머로 드디어 고지대의 바위 유적이 눈에 들어왔다. 알 데이르 사원이다.
알 카즈네가 the Treasury로 알려져 있듯, 알 데이르 사원은 the Monastery로 유명하다. 기원전 85년경에 만들어진 알 데이르 사원은 그 장식은 알 카즈네에 비해 조금 투박하지만 규모로만 보자면 알 카즈네를 압도한다. 그 모습은 800개나 되는 계단을 오르면서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여행자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풀어버릴 만큼 대단했다. 알 카즈네가 고요한 시크 끝의 아련한 인사였다면 알 데이르는 바위 사막 계단의 고생 끝에 찾아오는 청량한 바람 같은 느낌이다. 힘든 산행 끝에 본 건축물이라 그런지 인상도 더 강하게 남았다.
알 데이르의 앞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고 위쪽의 작은 언덕으로 올라가니 붉은 바위 산들이 발밑에 넓게 퍼져있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면서 송골송골 맺힌 땀들을 씻어 나가는데, 시원해도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자연이 주는 감동을 그 어디에도 담을 수 없다는 게 참 아쉽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보다 더 수월했다. 무릎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내려가기는 했지만 적어도 땀이 날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게 페트라 계곡이 물의 흐름으로 깎인 계곡이라 입구에서부터 안쪽까지 미세하게 내리막이다. 다시 밖으로 나갈 때는 미세한 오르막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아주 곤욕이었다. 게다가 시크부터는 좀 더 본격적으로 힘들어지는데 예상치 못한 마지막 한 방에 체력이 정말 밑바닥까지 떨어지더라. 내려가는 길에 바닥 모자이크가 인상적인 교회 유적을 들렀다가 마침내 페트라를 떠났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저녁도 먹기 싫고 씻기도 귀찮을 정도로 힘들어서 늘어져버렸는데 어찌하리, 아직 밤의 일정이 남아있는걸... 나이트 페트라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페트라를 찾았다.
Qasr al-Bint Temple & the Great Temple
(우) the Petra Church((375~600) - 당대의 모자이크가 보존되어 있다. 교회의 발굴 작업 중 '페트라 파피루스'가 발견되는데 비잔티움 제국 시절 그리스어로 작성된 문서는 현재 요르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이끌고 페트라를 다시 찾았다. 밤의 페트라를 찾은 사람들은 우리뿐만 아니었다. 일주일에 딱 월요일, 목요일에만 진행되는 나이트 페트라를 구경하기 위해 온 것. 우리도 이 날에 맞춰서 여행 일정을 짰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미생에서도 나이트 페트라가 한 장면 나왔다고 한다. 간단히 생각하면 야간개장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밤에 하는 행사와 유사한데, 엄밀히 따지면 알 카즈네까지만 구간을 개방하고 시크 트레일과 알카즈네 앞뜰을 오로지 별빛과 촛불로만 밝히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간 날은 달이 반 정도 차있었는데 달이 이렇게나 눈부실 정도로 밝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달빛, 별빛, 촛불 빛에 의지해서 기나긴 시크를 지나면 수십수백 개의 촛불들이 놓여있는 알카즈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 사람들이 둘러앉고 고요한 가운데 베두인들의 음악 연주회가 진행되고 알카즈네 앞의 조명이 환하게 밝혀지면서 낮에는 볼 수 없었던 보물창고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때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면 쏟아질듯한 별들을 함께 볼 수 있다. 그때 처음으로 별자리 어플의 필요성을 격하게 느꼈다.
사실 참 별거 아닌 행사였고 밤 사진을 찍을 게 아니라면 시시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분위기가 너무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자연 속에서 가장 자연과 어울리는 불빛에 의존해서 가장 자연과 가까웠던 소리들로 함께 된다는 느낌이 어우러지면서 참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만들어냈다.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도 이런 분위기와 감정까지도 담아서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