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컬쳐여, 영원하라!
90년대 후반 막혀있던 일본 대중문화 수입이 해제됐다. 그 당시 폭풍같은 초중생이었던 90년대생들은 해일처럼 밀려들어오는 일본 대중문화의 향연에 취하고 또 취했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특히 거대 로봇이 등장하는 ‘건담’에 열광했다. 건담이라면 옛날 영화는 물론 외전들도 찾아봤다. 한창 재밌게 하던 PS2 게임까지 섭렵했다. 수년간 모은 건프라는 한 때 책상 한모퉁이을 차지하고 있었다. 늠름한 건담들은 내 작은 세계의 수호신들이었다
그들이 창고로 내몰리게 된 것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였다. 비슷한 시기 산지 얼마 안됐던 PS3와 PS2를 중고로 팔았다. 5평이 채 안되는 작은 원룸에는 티비를 놓을만한 공간이 없었다. 수년간의 건프라는 해체하여 정리하니 고작 상자 몇개였다. 게임기를 매각한 돈 30만원은 어디 쓰였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내 10대를 장식했던 팝컬쳐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맺음되는 듯 했다. 그리고 몇 년, 한참을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은 엉뚱하게도 헐리우드의 한 감독 의해 부활했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언젠가 한 번 대중문화를 사랑했을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스필버그 감독의 헌정 영화와도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진다.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를 연출하면서 얼마나 행복했을지. 어딘가의 덕후라면 아마도 알 것이다. 스스로가 미쳐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공부하고 알아내고, 제작자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는 일이 고되지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제임스 홀리데이에 빙의하여 만들어 내고 싶은 세계관을 상상하고, 스스로가 좋아하던 팝컬쳐의 상징들을 곳곳에 숨겨두는 일을 하면서 스필버그 감독은 이미 헐리우드의 어느 뛰어난 감독이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소소한 덕후였을지 모른다. 아주 잠깐 스쳐지나가는 캐릭터를 위해 상상도 가지 않을 저작권 비용을 감수할 수 있던 것은 팝컬쳐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프닝 장면에 나오는 <마인크래프트> 로고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애초에 그 모든 것들을 흥행 스코어로 계산하는 것 자체가 스필버그에게는 무의미했을 것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제임스 홀리데이의 입을 빌어 두 가지를 제안한다. 현실을 사랑할 것, 그리고 팝컬쳐를 그저 즐길 것. 대중문화는 역설적이게도 각박한 현실에서 탄생했다. 학생들과 직장인들은 고된 하루를 끝내고 컴퓨터 화면의 게임과 영화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불행히도, 현실이 힘들어질수록 환상과의 대비는 더 짙어진다. 때로 그 간극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을 현실을 잊고 가상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막의 오아시스가 마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듯, 영화 속 ‘오아시스’ 역시 현실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살 수 있다. 현실을 도피하고 오아시스 속에서 살다시피 하던 주인공 파시발도 홀리데이의 경기를 통해 ‘오아시스’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원동력이 될 때 비로소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막 위의 샘물이 아무리 달다한들 결국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두 발 딛고 설 수 있는 든든한 토양 뿐이다. 그런 시각에 비추어 볼 때 ‘오아시스’를 단지 돈벌이로 보던 IOI의 놀란과 이모의 질 나쁜 애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제서야 우리는 게임을 게임으로, 영화를 영화로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대중문화는 여전히 문화예술계에서 폄하받는 존재다. 당장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장르 영화에 장르 영화는 지독히 박해바는 존재다(반지의 제왕과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굉장히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것에 굴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대중문화를 단순히 돈벌이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고, 대중문화를 폄하하는 자들에게 당당히 맞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