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公權力) 아닌 공권력(恐權力)
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에게 한국의 역사는 교과서가 아닌 기타 콘텐츠에서 접하는 것이 전부였다. 조선 왕들의 순서는 외우지 못했지만 거의 대부분이 드라마화된 덕에 왕들의 이름과 그들의 업적을 대강은 알고 있었고, 그 밖의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 큼직한 사건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중 내게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왔던 사건은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당시 그저 책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건들의 일부일 뿐이었던 광주에서의 비극을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가슴 아픈 사건으로 각인시켜줬다. 그날 이후로 5월 18일이 되고, 어디선가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영화 택시운전사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했는데, 마침내 영화를 본 오늘, 나는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인식 속에서 '광주 사태'가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전환되던 시절, 당시를 살았던 혈기왕성했던 부모님의 기억이 궁금했다. 그분들의 살아있는 기억은 당시 서울에서 지내던 사람들이 광주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였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1980년 봄은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모든 불국에 부처님이 내려오신 날, 오직 광주에만은 절망과 망각만이 존재했다.
육군 병장을 만기 전역한 김만섭은 군인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호언장담한다. 그것이 일반 상식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광주에서는 일반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군인은 시민을 폭행하고, 빨갱이로 몰아가며, 심지어는 백기 투항을 하는 시민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완벽한 비상식의 공기에 노출된 만섭은 한동안 혼란스러워하다가 쫓아오는 사복 군인을 피해 달아나고 이윽고 진정한 공포와 마주하게 된다. 쓰러져서 골목의 틈을 통해 시민들이 군 차량에 실려 끌려가는 모습은 마치 나치와 유대인들의 장면과 겹쳐 보이는데, 화염의 붉은 공기를 통해 지옥의 참혹함과 공포를 보여준다.
어렵사리 도망쳐 나온 순천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온하다. 왜곡된 광주의 폭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만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만약 그 장면에서 분노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면 전형적인 클리셰, 모든 감동이 깨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섭은 분노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우리들도 오열할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관객은 택시운전사 만섭을 통해 철저한 외부인으로써 광주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것은 10년 전의 화려한 휴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진행된다. 이전의 영화가 다소 전쟁영화적인 느낌으로 광주 시민들의 열정과 분노, 그리고 후대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염원의 뜨거운 감정으로 가득했다면, 이번 영화는 공권력에 대한 공포와 무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하다.
극 중 등장하는 군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하는데 마치 그 존재만으로 오금을 저리게 만들고 광주 시내에서 만섭과 피터를 쫒는 사복 군인들의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처럼 묘사된다. 전쟁과 적이라는 인식은 우리가 상대를 싸워 이길 수 있고 대등하다는 인식에서나 존재하는 것. 이 영화에서 그런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공권력 앞에서의 완벽한 굴복과 죽음만이 존재할 뿐. 그곳에서 살아남는 길은 단지 도망치는 길뿐이다.
공(公)은 없이 공(恐)만 만연하던 시간이었다. 권력을 뺏길 것이 두려웠던 그들, 빨갱이가 나라를 전복시킬 것이 두려웠던 군인들, 허튼 기사를 냈다가 보안사에 끌려갈 것이 두려웠던 언론사 사장. 공포의 만연 속에서 이성적인 생각은 작동을 멈추고 그 때부터 아비규환의 시작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극의 진행이 변호인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 마지막의 카체이싱 장면 등 흠을 잡자면 흠을 잡을 수 있는 부분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 당시의 모습을 내부인의 입장이 아닌 외부자의 시선으로 묘사했다는 점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고, 그렇게 등장하는 인물들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기보다 마치 바로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표현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지난 며칠동안 덩케르크와 군함도 등을 통해 고민하던 팩션의 중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고, 아직까지 이야기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 역시 이렇게 좋은 기회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