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의 경계 위에서 존재를 찾다
재미 0.6 / 연출 0.9 / 배우 0.8 / 각본 0.8 / 만족도 0.7
영화를 보고 나오며 든 가장 첫 생각은,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으로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온갖 상징과 어딘가 무기력한 주인공, 의문의 주변인물들까지. 꿈인지, 환상인지 구별조차 잘 되지 않는 듯 모호한 세상 속에 이창동 감독의 메타포가 폭발한다. 나의 문장력으로 과연 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영화인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자답하고 싶지만, 시를 읽음에 정답이 있겠는가. 시를 읽고, 그 추상적 감상을 머릿속에 떠올리듯, 영화 <버닝>에 대한 생각도 잡설로서 지껄이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상당히 많은 상징을 토해내지만 그 많은 것들 하나하나의 실체를 밝혀내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고 수수께끼 같은 세상 속에서 희미해지는 존재를 좇는 청춘의 이야기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모호한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종수(유아인), 삶의 의미를 찾아 울부짖는 해미(전종서), 자신의 의미를 찾아 정의를 내린 벤(스티븐 연). 영화를 이끌어 가는 세 인물이 보여주는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이 보여줄 수 있는 세 가지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 속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햇빛, 우물의 존재, 아버지, 송아지, 비닐하우스 등의 메타포는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서 하루키적 세계관에 이창동의 색을 입히는 적절한 도구이다.
존재를 인식함은 역설적이게도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무의 공간을 먼저 인지하고, 무와 구분되는 경계를 그리는 것으로 우리는 ‘존재한다’고 비로소 느낀다. 불은 현상일 뿐 실재하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 뜨겁고 밝게 빛나며 존재를 뽐낸다. 하늘을 붉게 불태우며 아스러질 때 비로소 존재감을 뽐내는 붉은 노을처럼 불태워 끝맺음은 종결로서 의미가 있게 되는 이 세상 모든 존재의 가장 강렬한 최후다. 그런 과정에서 벤의 다소 미스테리한 취미생활은 ‘인생의 의미를 좇는 자들’을 위한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버려진 비닐하우스의 공포를 느끼는 종수 역시 끝내 자신만의 답을 찾아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 불태우는 것에 성공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수께끼를 던지지만, 해답은 보여주지 않는다. 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해미는 어디로 갔는가, 우물은 있었는가, 종수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 명쾌한 사실을 주지 않는 상황에 관객들은 답답함을 느끼지만, 영화는 주어질 뿐인 사실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전혀 돕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해미의 행방에 대해 그저 ‘사라졌다’ 이상의 답이 필요 없는 벤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정답만 유의미 할 뿐이다. 해답을 주기를 기다리던 종수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 멀어지는 해미의 방 창문 속에서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종수가 그려가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