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멱 Jun 03. 2018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

소리내도 죽을 정도는 아니다

재미 0.7 / 연출 0.5 / 배우 0.7 / 각본 0.5 / 만족도 0.7

총 점 3.1 / 5.0


알 수 없는 존재들의 공격으로 세상은 멸망한지 오래다. 자연에 침범 당한 인간의 옛 도시는 죽음을 기다리는 텅 빈 존재다. 그나마의 작은 희망을 찾아 도시를 떠나는 가족은 저마다의 짐을 짊어지고, 죽음이 뒤좇아 올라, 맨발로 숨죽여 이동한다. 필요한 대화는 모두 수화로 해결하는 절대 침묵의 상황 속에서, 울려퍼지는 경쾌한 장난감 소리는 그들에게 절망을 선물한다. 모든 것이 희망이 전무한 상황으로 시작하는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작은 침넘김 소리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우주전쟁>, <나는 전설이다> 등으로 한 때 종말론적 영화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인류가 사라진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변할지, 무도덕의 세상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섭게 돌변할 수 있는지 등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 점에서 손쉽게 클리셰를 따라갈 법도 했을 영화는 ‘소리’라는 점을 앞세워 차별성을 잡았다. 다만 ‘가족’, ‘부성애’ 코드의 강렬한 기시감은 영화의 큰 약점 중 하나다.

귀가 들리지 않는 딸의 모습은 앞이 보이지 않는 괴생명체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그것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엄마와 딸의 얼굴을 교차해서 보여줄 때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습을 통해 연출하니, 그보다 직관적인 설명이 가능할까. 다만 이후에도 딸의 장면에는 화면이 소리를 먹어 침묵으로 연출했다면 긴장감도 극대화되고 딸에 감정이입이 더 잘됐을텐데, 그렇지 않아서 아쉽다.

철없는 막내가 초반에 사고를 당한 일과 그에 대한 트라우마,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가족의 모습은 영화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플롯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강조점이 없었던 것은 아쉽다. 고작 네 살 남짓된 동생의 죽음에 자책하며 엇나가는 딸의 모습이 단지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니면 사춘기의 일부인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꿈으로 묘사하지만, 그에 따른 아버지와 어머니의 행동은 부모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행동일 뿐, 트라우마에 기인한 각성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동생의 죽음이 괴생명체의 행동양식을 소개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소모됐다고 이해하는 편이 개연성이 더 높다.

괴생명체의 행동양식, 그에 대해 대처하는 가족의 모습, 파괴된 인간문명의 모습은 극한의 긴장감을 야기하기에 개연성이 다소 떨어진다. 청각이 극도로 발달했을 뿐, 앞이 보이지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괴물의 정체는 그다지 공포스럽지 않다. 걷는 모습 등으로 보아 박쥐에서 모티프를 따왔는가, 싶으면서도 초음파로 앞을 볼 수 있는 박쥐와 비교했을 때도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 어둠 속에서 소리만 듣고 은밀히 다가오는 공포의 존재로 묘사되지 않고 단지 소리가 들리면 돌진하고 보니, 영화를 보면서 괜히 어떻게 하면 사냥 할 수 있을지만 떠오른다. 영화의 설정에 허점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테다.

개봉 당시 크게 주목받아 부푼 기대를 안고 영화를 봤지만, 그에 크게 미치지 못해 아쉽다. 기존의 클리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설정은 칭찬할만하지만, 그보다 개연성의 허술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면 영화 전체의 맥락이 무너질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버닝(20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