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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멱 Jun 22. 2018

스틸 앨리스(2014)

나를 나로 규정하는 것에 대하여

재미 0.6 / 연출 0.8 / 배우 0.9 / 각본 0.8 / 만족도 0.9

총 점 4.0 / 5.0


2015년의 아카데미 시상식은 유독 기억에 남는 시상식이었다. <이미테이션 게임>, <아메리칸 스나이퍼>, <버드맨> 등 필자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영화들이 포진해 있었다. 지금의 오스카가 다소 사회적인 문제에 집중하면서 미국적인 이야기를 풀어갔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물론 그런 영화들 또한 훌륭한 영화들이다). 그 중에서도 인상깊었던 영화는 줄리안 무어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스틸 앨리스Still Alice>였다.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뭘까. 감정, 또는 기억? 그것이 기억이라면 그를 이해하는 것은 비단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기억을 온전히 컴퓨터에 옮겨 담아 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동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이야기는 2014년도에 개봉한 <채피Chappie>에서 비슷하게 다뤄진다. 닐 브롬캄프 감독이 영화를 다소 SF적으로 풀어가면서 존재론에 대한 이야기가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았던 점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기억을 데이터화해서 신체가 손상된 주인공을 로봇에 업로드하는 장면만큼은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스틸 앨리스>의 접근법은 다소 다르다.

주인공 앨리스(줄리안 무어)는 기억을 잃는 것이 두렵다. 평생을 받쳐 쌓아온 커리어가 사라지면서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모래알처럼 사라져만 가는 것은 원초적인 공포다. 하지만 단 한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스스로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 손가락 사이로 흘러 빠지는 수많은 사실들 가운데 그 단 하나의 진리만을 손에 쥐고 앨리스는 그를 삶의 희망 삼으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내 기억의 저주에 삼켜진 앨리스는 이전의 모든 것을 잃은 채 그저 아이처럼 살아가게 된다. 비극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영화의 결말이 희망적이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에서 앨리스를 규정하는 것은 앨리스의 학자로써의 커리어도 아니고, 그가 살아오며 축적했던 지식과 기억도 아니다. 그녀의 딸(크리스틴 스튜어트)은 어머니가 사라져가는 것에 큰 좌절감을 느끼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아이가 된 그녀 또한 ‘여전히 앨리스’라는 것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앨리스를 앨리스로 규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 스스로를 스스로로 만들어주거 자아를 지켜주는 것이 단순히 기억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다단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보다더 감성적인 부분이다. 모든 것이 아스라지는 가운데, 앨리스는 어느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 순간이 앨리스를 앨리스로 남기는 순간, ‘여전히 앨리스(Still Alice)’일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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