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찾은 방법 2가지
직장생활을 막 시작할 당시 프로모션 기획자로서 같은 부서에 있는 학교 선배에게 들었던 말이다. ‘선배는 참, 같은 디자인과 나와서는 그런 말씀을…’ 디자인과 졸업생이 꼭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는 법은 없지만 말이다.
선배는 디자이너에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디자이너는 프로젝트 끝단에 결과물만 만드는, 소위 그림만 그리는 사람이기에 한계가 있다는 전제를 둔 것이다. 선배가 정의하는 디자이너로서 일을 시작했지만 같은 프로젝트을 진행하는 동안 선배는 기획 회의에 가능하면 나를 참여시켰다. (그땐 진짜 왜 이렇게 귀찮게 하시나 싶었어요...하하하)
덕분에 운이 좋게도 크고 작은 프로젝트의 기획부터 참여해 다양한 아웃풋을 디자인했다. 그래서일까 프로젝트를 진행할수록 디자인과 기획 사이에 궁금증이 생겼다. 어떤 아웃풋을 내건 기획 즉, 이야기가, 구조가 있어야 만들 수 있는 일인데 기획을 아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디자이너와 기획자를 구분할 게 아니라, 기획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각적인 아웃풋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디자이너 아닐까? (여기서 시각적인 아웃풋은 그래픽과 프로덕트 뿐만이 아닌 글과 같은, 말그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
디자이너와 기획자는 나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는 이미 기획자의 기질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정의를 기반으로 한다면, 디자이너는 프로젝트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는 넓은 업무 스펙트럼으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 내가 일하는 곳은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업무 간 소통이 활발하고, 많은 이슈를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과정을 거친다. 앞서 말한 좁은 범위의 디자이너로 제한을 두고 싶지 않으면서, 당연하게 기획부터 참여하기를 원하는 나로서는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환경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다시금 좁아지는 걸 느꼈다. 비즈니스를 확장하면서 업무는 많아지는데 구성원을 마구 늘릴 수는 없다보니 각자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겨우 해내도 시간이 부족한 수준이 되었다. 시각적인 아웃풋이 필요한 프로젝트에 나를 투입시키고 앞단에서 기획을 마무리한 뒤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달라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는 그림만 그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알맹이부터 만들기 어렵다면 적어도 명확히는 알아야 적합한 아웃풋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럴 수 없다면 현재 상황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거나 더 나은 환경을 향해 나아가야 함은 분명하다.
기획과 디자인과 개발은 처음부터 함께 가야 합니다. 이루고 싶은 목표에 공감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각자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가며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의 일에 더 적극적으로 간섭해야 합니다.
장인성, <마케터의 일>
혼자 속앓이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개선해보려고 찾은 방법 두 가지.
1. 디자인 요청 양식 만들기
당연히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스타트업에 디자이너가 혼자라면…) 모든 프로젝트의 기획부터 참여하기에는 물리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여태 우리 조직에는 최소한으로 필요한 절차와 양식도 없었다. 일단 이 작업을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필요한지 담은 알맹이를 명확히 알아야 했다.
회의 시간에 선언했다. 앞으로 슬랙을 통해 단발성으로 요청 받지 않고, 직접 만든 노션 양식을 통해서 요청 받고 싶다고. 단순히 아웃풋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과 사양만 적는 양식이 아닌, 그보다 의도와 목적을 적는 문항을 가장 우선순위에 둔 양식을 공유했다.
요청하는 동료는 문항을 작성하면서 어떤 작업이 왜 필요한지 스스로 정리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물음표가 생기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좋은 아이디어나 의견은 역으로 제안한다. 물론 요청한 동료도 디자인 결과물에 질문하고 제안하는 과정을 거친다. 서로 최대한 간섭하며 다듬어진 만큼 의도와 목적은 명확해지고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2. 개인 프로젝트 진행하기
다만 일이란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계속 자기 생각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속여서는 안 된다.
폴커 키츠, <오늘 일은 끝>
직장은 고집스럽게 내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개인의 목표가 아닌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타협해야 하는 순간이 비일비재하다. 그렇다고 욕망을 억누르며 활동 범위에 울타리를 치고 싶진 않다. 2년 간 꾸준히 세상을 관찰하고 발견하는 데 게으름 피우지 않고, 다양한 플랫폼에 생각을 기록하며 콘텐츠를 디자인하는 이유다. 어떻게든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구조부터 설계하는 훈련을 하며 스스로 활동 범위를 넓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관리받는 쪽이 훨씬 편하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자유를 내던지고 관리받는 길을 선택하려 하는데, 그런 사원들에게 진정한 기획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나는 사원들에게 자유를 요구한다.
마스다 무네아키, <지적자본론>
이번 글은 며칠 전 츠타야를 설립한 마스다 무네아키의 <지적자본론>을 읽고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할 당시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라 써본 글이다. 고객 가치를 위해 발로 뛰며 자유를 지향하는 태도와 꿈을 꾸고 실행하기를 반복하라는 용기. 책을 통해 디자이너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배웠고 나의 생각에 힘을 얻었다. 책에서 수집한 문장은 블로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