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거 같아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 됐어요.
아버지,
나는 지금 잘못 지은 건물처럼 나만 아는 속도로 아주 천천히 무너지고 있어요.
<인간실격>
2021년 가을에 방영된 드라마의 제목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되지 못한 여자, 부정. 인생의 지표들을 전부 이루지는 못해도 남들과 비슷하게 두엇은 손에 쥐고 있을 거라고, 그게 실패하지 않은 삶이라고, 그게 마흔 즈음의 모습이라고 믿고 살았던 여자, 부정. 그녀가 처연하게 읊조리는 말들이 가시처럼 파고듭니다. ‘남’과 같은 인간의 자격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그녀의 이름은 어떤 의미를 담아낸 것일까요?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한 여자. 아버지로부터 꽉 찬 사랑을 받은 여자. 부정(否定) 당한 부정은 부정(父情)을 통해 일어섭니다.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내내 삶으로 보여준 그녀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죽는 것도 사는 것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은 부정은 다시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딛고,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려 합니다. 별일 없다 못해 아무 일도 없는 듯 사는 내가 부정과 그녀의 아버지를 보며 매 화마다 눈물을 쏟았습니다. 왜 토해내듯 눈물을 쏟아냈는지 답은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지만 외면해 왔습니다. 외면당한 마음은 한 움큼 떼어진 채 서랍 속 깊숙이 봉인되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죽었습니다. 술을 먹고. 술을 먹다가. 시커먼 피를 쏟아내고 죽었습니다. 술을 먹다가 인생에서 실격되고, 실격된 인생을 견디느라 술을 먹고. 남들처럼 살지 못해서, 결국 ‘남’이 되지 못한 아버지는 삶의 유령이 되어 술을 마셨습니다. 아버지의 삶은 술과 실격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 안에 유배되어 빠져나올 길이 없었습니다. 나는 재봉틀에 끼인 천처럼 아버지가 찌르는 바늘에 피할 도리 없이 찔렸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법 멀쩡한 건물이었습니다. 바늘에 찔린 흔적 없이 적당한 규모, 적당한 외관이었겠지요. 내부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스스로도 몰랐어요. 제대로 서 있다고, 번듯한 모양새라고 생각했습니다. 깨금발로 서 있는 것이 익숙해서 엄지 발톱이 문드러지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종합병원 중환자실의 반 평짜리 침대 위에 죽음에 절여진 아버지가 누워있습니다. 죽음에 절임 당한 아버지의 살점이 행여 바스라질까 꽉 잡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거동조차 힘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고모와 고모부가, 삼촌이 꾸역꾸역 한 차를 타고 상주에서 대구까지 왔습니다. 20분의 면회 시간 동안 두 명씩 짝을 지어 병실에 들어갔습니다. 여덟 명이 나눠 써야 하는 시간은 쩨쩨해서 그 방에 내려앉은 죽음의 공기를 들이마시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손수건으로 한차례 눈물을 찍어내고 어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장례식은 상주 가서 해야지. 고향인데. 거기 다 있는데.
지금 저 사람 주소지가 상주니까 대구에서 화장하면 비싸대요.
아버지는 지금 살아있는데 오가는 말들은 이미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아버지의 삶은 뿌리째 거세당했습니다. 깨금발 위로 삶을 거세당한 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덮어썼습니다. 미카엘의 환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고모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아빠는 이제 안 된다고. 어쩔 수가 없는 거라고. 천사마저 포기하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인간실격일까요? 듣고 싶지 않은 말들로 모질게 매질을 당할 때 남편이 귀를 막아주었습니다. 아주 따뜻한 방패였습니다.
아버지에게도 방패가 필요했을 겁니다. 마음이 ‘도나스’처럼 뻥 뚫린 채 깨금발로 서 있던 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곁눈으로, 귀로, 어깨로 아버지의 텅 빈 마음을 분명히 보았을 겁니다. 아버지가 재봉틀을 쉴 새 없이 돌린 것은 마음의 구멍을 꿰매고 싶었기 때문일까요?
‘나는 아버지를 향하여 영원히 눈먼 자다.
아버지는 죽었고 지금 죽어 있으며
나는 살아왔고 살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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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향해 눈먼 동안 아버지의 집은 결국 무너져 내렸습니다. 나는 작은 방패 하나로 삶의 이방에서 이쪽으로 훌쩍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손이 귀마개가 되어주었듯 내 손이 이방의 아버지를 끌어올릴 밧줄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손이 아릿해 자꾸만 곱아듭니다. 나에게 바늘이었다가 실이었던 당신. 어쩌면 당신은 내 마음을 바늘로 찌르는 것이 아니라 구멍 난 마음을 색실로 촘촘히 꿰매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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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