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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Jul 29. 2022

참이 있다

眞. 참 진.

술 이름에 쓰인 한자가 내 이름에도 있는 것은 우연일까요, 운명일까요. 이슬을 좋아한 아빠에게 초록병은 진리였을 것입니다. 내 이름에 묻어둔 뜻이 ‘미스코리아 진’이길 바랐지만 어쩔 수 없는 ‘금복주’인 것을 직감합니다. 나는 술이 싫었습니다. 술은 아빠를 이무기처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지 못한 채 물 속에서 똬리를 틀고 먹구름을 불러오는 이무기. 용처럼 바깥 세상에 천둥 번개와 비바람을 일으킬 힘은 없어 서식하는 물가에만 비구름을 몰고오는 이무기. 아빠가 불러온 먹구름은 집 안 전체를 드리웠습니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방, 앉은뱅이 밥상 앞에 웅그린 아빠. 밥상에 덩그마니 있는 초록병은 어둡고 축축했습니다. 먹구름은 음습하여 집 안은 내내 물기가 마르지 않았습니다. 


초록병에 적셔진 아빠의 눈은 벌겋게 불타거나 거멓게 내려앉았습니다. 그 색깔 변화에 따라 집 안의 온도도 달라졌습니다. ‘우리 딸이 첫 잔 채워주면 술 끊는다.’ 초록병의 뚜껑을 돌리는 아빠의 눈은 잔잔했습니다. 그럼에도 ‘따다닥’ 뚜껑이 돌아가는 소리에 머뭇거려졌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아빠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지만 소주잔 가득 찰랑이게 술을 따랐습니다. 어쩐지 떨렸습니다. 기대를 한 것 같습니다. 두 잔, 세 잔, 네 잔이 지나고 일곱 잔의 마지막 방울까지 똑똑똑 받아내는 아빠의 눈은 결국 이무기처럼 변했습니다. 순일한 믿음은 또다시 무너졌습니다. 굉음과 함께 치솟은 불에 데고 떨어지는 재에 그늘이 졌습니다. 온 가족이 버섯구름 아래에서 낙진을 맞았습니다. 나는 아빠의 마음속 폭탄을 건드리는 술을 증오했습니다. 술에 취해 폭탄을 터트리는 아버지를 증오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아빠가 매일같이 마시는 초록병 속 액체를 유리컵에 따랐습니다. 조심스럽게 쫄쫄 흐르던 물길이 점차 콸콸 쏟아졌습니다. 홀린 듯 무겁하게 쏟아부었습니다. 어쩌면 아빠 몫을 줄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리컵에 투명하게 담긴 그것은 무해한 수돗물 같았습니다. 아빠처럼 한입에 털어 넣자 그것은 목구멍을 넘어 식도를 따라 불길을 냈습니다. 순식간에 가슴까지 불이 붙었습니다. 화기에 뒤덮인 몸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아빠는 밤낮없이 불에 타는 고통 속에서 살았던 걸까요. 아빠를 뜨겁게 하는 고통의 근원이 술인지 가슴 속 불인지 헷갈릴 때 이무기가 승천하듯 그것이 목구멍으로 다시 뿜어져 나왔습니다. 목이, 얼굴이, 다시 가슴이 홧홧했습니다. 


열다섯 살에 맛본 첫 술은 불이었습니다. 마흔두 살의 아빠에게 술은 스스로를 태우는 고문이었을까요. 아빠도 열다섯 살 즈음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빠의 증조할머니가 빚은 막걸리가 첫 술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빠에겐 첫 술이 달았던 걸까요. 직접 맛본 소주는 나와 아빠 사이의 담에 벽돌을 한 줄 더 쌓게 했습니다. ‘그래도 아빠가 너는 예뻐하잖아.’ 아빠가 터트리는 폭탄을 혼자 맞은 듯 이야기하는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아빠의 사랑은 눈치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무형의 사랑. 모양이 없는 사랑은 어린 마음 한구석에 홈을 팠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다가도 자꾸만 홈에 걸려 삐끗했습니다. 군데군데 팬 홈들은 함정 같았습니다.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나는 늘 복숭아뼈가 시큰거렸습니다.


스무 살이 되어 다시 맛본 술은 어쩐지 달았습니다. 기름에 튀겨 설탕을 잔뜩 버무린 건빵과 소주의 조합.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건빵을 깨뭅니다. 유약을 바른 듯 소주로 도포된 치아의 홈 사이사이에 설탕건빵이 스며듭니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차례로 맛보는 제의 같았습니다. ‘인생의 쓴맛’을 인위적으로 맛보고 곧바로 단맛으로 덮습니다. 유예한 쓴맛은 숙취가 되어 다음 날을 그리고 그 다음 날들을 잠식합니다. 단맛에 취해 미뤄둔 괴로움은 한발 늦게 찾아옵니다. 아빠는 소주의 쓴맛으로 살아내는 일의 괴로움을 덮어둔 걸까요. 마치 아편처럼 강한 쓴맛으로 생의 통증을 조절했던 것일까요. 대학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달디단 술은 겁과 용기의 자리를 슬쩍 바꿔주었습니다. 수줍음을 명랑함으로 바꿔치기했습니다. 그럼에도 술이 아편이 되지 않고 단맛만 골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동기라는 끈끈한 친구들과 함께 마셨기 때문입니다.


열다섯 살에 시작된 아버지의 술의 역사는 50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습니다. 술맛이 단 것을 알았을 때 앉은뱅이 밥상 앞에 웅크린 아빠에게 술잔을 부딪쳤다면, 아빠도 단맛을 다시 맛볼 수 있었을까요? 아빠의 눈이 바뀌었을까요? 아버지의 생이 지금까지도 이어졌을까요? 이제 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딸이 부딪혀온 술의 단맛이 포기와 의지의 자리를 바꿔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빠가 내 이름에 묻어둔 것은 술이 아니었을 겁니다. 갈구했지만 끝내 아빠를 자빠뜨린 참이, 진리의 여의주가 나에게는 반드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참이 있다. 진리가 있다. 有眞. 내 이름은 참의 이방에 서 있던 아버지가 나의 생은 참에 속하기를 갈망하는 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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