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과 바다색이 하나다. 파란색 스펙트럼 안에 있는 물감들을 넙적한 페인트 붓에 한꺼번에 묻히고 들숨에 그은 듯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하다. 7월의 동해는 하늘과 바다가 자물린다. 여자는 눈 앞에 펼쳐진 천연 그림을 보며 남자에게 수평선을 짚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여자의 물음에 남자는 좀처럼 대답이 없다. 여자는 남자의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을 보며 선글라스에 가려진 표정을 가늠해본다. 남자는 그림 같은 ‘하늘바다’보다 작열하는 태양에 먼저 반응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가 맞물린 것은 남자를 감응케 하지 못한다. 남자의 배꼽 밑은 어떤 것에 꿀렁일까 여자는 자못 궁금해진다.
남자는 태슬이 풍경처럼 흔들리는 파라솔을 펼쳐 모래에 꽂는다. 머리까지 받쳐주는 긴 간이의자를 꺼내 자리를 만든다. 나뭇결 무늬 때문에 얼핏 원목으로 보이는 미니 테이블에 다리를 하나하나 끼워 넣는다. 발로 모래를 평평하게 다지고 테이블을 내려놓는다. 앉았을 때 종아리가 테이블에 닿지 않도록 간이의자와 테이블 사이의 간격을 띄운다. 햇빛이 의자 위로 들이치지 않게 파라솔의 각도를 조정한다. 남자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남자는 잘 마른 장작 같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순간에는 뜨거울까, 여자는 생각한다. 일련의 과정을 끝내고 간이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어 앉은 남자는 그제야 입술을 뗀다.
“더워.”
앞선 질문에 관계없는 두 음절의 답을 듣는 데 1겁의 시간이 걸린 듯하다. 남자의 언어가 목소리로 발현되기까지 여자는 홀로 천지가 한 번 개벽하는 시간을 보냈다. 남자의 이마에서 선크림의 번들거리는 유분을 제치고 땀방울이 솟아난다. 땀방울이 미간의 고랑으로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찰나를 여자는 지켜보았다.
“하늘색이랑 바다색이 같아.”
“응.”
“수평선 구분할 수 있겠어?”
“응.”
“커피 사러 갈까?”
여자는 좀처럼 잇닿지 않는 ‘하늘바다’ 그림에 대한 감흥을 뒤로 물리고 말했다. 남자의 미간에 팬 고랑과 이랑이 조금 전보다 짙어지는 듯하다.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물놀이에 온전히 몰입한 어린 여자와 좀 더 어린 남자를 부른다.
“커피 사러 가자.”
남자의 말을 어린 남자는 거부한다. 남자와 어린 남자는 바닷가에 남았다. 남자는 물놀이에 온몸을 바치는 어린 남자의 튜브를 끌어준다. 여자는 카페까지 동행해준 어린 여자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 여자가 스물아홉 살일 때 태어난 어린 여자는 지금 열두 살이다. 맞은편 카페로 걸어가는 동안 축축한 해변 슬리퍼가 금세 마른다. 슬리퍼에서 모래가 소보로빵 부스러기처럼 떨어진다. 여자와 어린 여자가 지나온 자리에 모래 표식이 남는다.
잘랑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선 카페는 밝은 색 원목 테이블과 라탄 의자, 초록 화분들이 성기게 놓여 있다. 청량한 동쪽 바다를 안온하게 품은 듯하다. 단정한 메뉴판에 ‘아몬드크림 라테’가 시그니처 메뉴라고 쓰여 있다. 여자는 평소의 취향인 바닐라라테와 새로운 아몬드크림 라테 사이에서 고민하다 선뜻 아몬드크림 라테를 주문한다. 여행이니까, 여자는 변명하듯 혼잣말을 한다. 여자는 어린 여자와 함께 바다를 향해 크게 난 창가 앞 테이블에 앉았다. 맞은편 바다의 흥성거림이 창을 뚫고 전해진다. 여름의 바닷가는 살아있는 것들이 광활하게 넘실댄다.
“주문하신 아몬드크림 라테 나왔습니다.”
맞은편 바다를 헤매던 여자의 눈과 귀가 돌아왔다. 여자와 어린 여자가 커피를 받으러 가자,
“어머니. 이건 빨대 없이 그냥 드시는 걸 추천해요.”
단정한 청년이 가붓하게 말했다. 여자는 어쩐지 밀랍인형 같은 얼굴로 커피를 건네받고 나머지 한 손으로 빨대를 챙겼다. 몽당한 동작이 어린 여자의 그것보다 작았다.
여자는 커피를 들지 않은 손으로 어린 여자의 손을 잡고 왔던 길을 똑같이 걸었다. 모래사장이 전보다 깊숙해진 것 같았다. 바짝 마른 슬리퍼가 모래밭에 푹푹 빠진다. 잘 벼린 모래가 발등을 할퀸다. 커피잔에 어느새 물방울이 맺힌다. 남자는 간이의자에 누운 듯 앉아 있고, 어린 남자는 모래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이거 마셔. 난 안 마실래.”
“안 마셔.” 남자는 캔커피를 좋아한다.
“나도 안 마셔.”
“맛없어?”
“나한테 어머니래.”
“뭐?”
“학교도 학원도 아닌데 나한테 어머니래.”
건조하던 남자의 얼굴에 어쩐지 옅은 웃음이 휘감긴다. 여자는 남자의 표정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모처럼 선연한 남자의 표정을 놓칠 리 없다.
작열하는 태양빛이 남자에겐 어느새 볕뉘로 바뀐 듯하다
.
커피잔의 표면에서 물방울이 후두둑 길을 내며 떨어진다
.
여자의 목덜미에도 물방울이 흐른다
.
저녁을 먹고 걷는 해변길의 공기는 낮과 다르다. 공기 속에 드라이 아이스가 뿌려진 것 같다. 여름, 동쪽 바다의 해는 저녁 어스름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이윽고 해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임에도 녹록하지 않은 기세가 어쩐지 신산하다. 종내는 해가 저무는 것처럼 여성성도 저무는 것일까 생각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고 여자는 생각한다. 이제 겨우 마흔일 뿐인데. 무연한 생각으로 이어진 생각은 무용한 생각을 낳았다.
“나 어머니처럼 보여?”
“어머니 아니야?”
“아니. 당신 어머니처럼 어머니. 그 어머니로 보이냐고. 어머니란 말은 그 어머니인 거야.”
남자는 이번에도 좀처럼 대답이 없다. 해를 삼킨 바다는 남자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남자는 막(膜)으로 둘러쳐진 듯하다. 막은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얇지만 고유의 기능을 수행한다. 가령 귀찮아서 제거하지 않은 계란 알끈 때문에 보들보들한 계란찜을 먹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어째서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거야? 질문도 대답도 무용한 밤이 찾아왔다.
여름밤의 해변이 어쩐지 부산하다. 겉보기에도 화려한 카메라와 음향 장비, 조명 같은 것들이 해변의 데크에 흩어져 있다. 무대로 보이는 곳에는 키보드와 드럼이 세팅되어 있다.
“공연하나 봐.”
“보고 갈까?”
남자와 여자는 사람들 끄트머리에 어린 남자와 어린 여자를 감싸는 듯한 대형으로 나란히 앉았다.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점차 사그라들고 MC가 무대에 올랐다. 여름밤을 달구는 Rock 페스티벌이 시작됐다. 건조한 남자와 뜨거운 Rock 음악이라니. 여자가 남자의 얼굴을 살피는 동안 음악은 ‘기억을 걷는 시간’을 흘려보낸다. 노래는 여자가 남자와 연애하던 시간을 걷는다. 친구로부터 급작스레 소개받은 날 마신 호가든 병맥주, 다음 날 만나서 본 영화 ‘우리 집에 왜 왔니’ 같은 것들이 음표 사이를 유영한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그때의 느낌이 잔광처럼 흘러온다.
여자가 기억을 걷는 동안 어린 여자와 어린 남자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데려다줘야겠어. 혼자 볼 수 있겠어?”
“응, 좀 더 볼래.”
남자는 어린 여자와 어린 남자를 데리고 일어섰다. 빈자리는 순식간에 메워졌다. 여자는 노래와 노래 사이, 그 틈새로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남편의 부재로 막의 결계가 풀린 느낌이었다. 불안하다. 여자는 불현듯 스치는 상념에 적잖이 놀랐다. 익명의 사람들 속에 혼자 섞여 있는 것이 불안이라니. 여자는 잔상을 떨치려는 듯 황금빛 머리칼을 올올이 날리며 음을 잡아내는 베이시스트에 집중했다. 우주를 찌르는 듯한 드럼과 베이스의 장렬한 사운드 대결로 공기가 흠뻑 젖었다. 여자의 몸은 우기를 맞은 듯 땀을 쏟아냈다. 베이스 같은 묵직한 진동이 울린다. ‘나 뒤에 있어. 계속 볼 거야?’ 남자의 문자였다. 여자는 뒤를 돌아 남자의 위치를 확인하고 곧바로 일어서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몇 발짝만 가면 되는 길을 흥분한 사람들에 밀려 휘청였다. 남자는 여자의 팔목을 잡아 자기 앞에 세웠다. 다시 막(膜). 결계가 쳐진 것 같다. 남자에게만 씌워져 있던 막 안에 여자도 안착한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점프하며 함께 ‘말 달리자’는 밴드의 노래에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의 축축한 손과 남자의 건조한 손이 맞닿았다. 서늘할 줄 알았던 건조한 손은 뜨거웠다. 여름날 방바닥의 습기를 제거하는 보일러 온기처럼 남자의 손은 여자의 손을 보송하게 말려주었다. 그때도 손이었다. 여자가 좋아하는 호가든을 술을 마시지 못해 사양하는 남자를, 여자가 고른 영화가 지루해 눈을 깜빡이는 남자를, 다음 날에도 다시 만날 약속을 했던 이유는 서늘한 피부 아래 느껴지는 뜨거움 때문이었다. 뜨거운 건조함이 물기 어린 여자를 올올이 말려준다. 계란의 알끈은 노른자를 고정시켜 움직이지 않게 한다. 막(膜)은 남자를 삶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고정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자는 언젠가부터 막에 둘러싸인 느낌을 안전하다 여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창으로 들이치는 오후의 햇빛에 면도를 하지 않은 남자의 턱이 반짝인다. 남자의 옆모습이 원래 눈부셨나. 아니다. 흰 수염이 피부막을 뚫고 삐죽 올라온 것이었다.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끌어들인 토끼 같은 남자에게 흰 수염이라니. 여자는 시간의 범람을 느낀다. 전날 밤, ‘말 달리자’고 노래하는 밴드의 점프에 남자의 손을 잡고 뛰던 여자는 옆줄에 서 있던 어느 ‘아버님’이 같이 뛰자 미시감을 느꼈다. 여자는 결계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고정하고 있었던 것일까. 각자 고정한 것은 다를지라도 이상한 나라의 막(膜)은 여전히 그들을 에워싸고 있다. 앨리스는 어머니가 되고 토끼는 흰 수염이 돋은 채 보송하게. 그리고 안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