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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Jul 29. 2022

배꼽 만지는 아이

찌륵찌륵. 아홉 살 난 혜원은 맨날 배가 아프다. 가족들 손에 이끌려 동네에 있는 병원과 한의원, 용하다는 침집까지 차례대로 모조리 가봤지만 도통 원인을 알 수 없다. 아무래도 배 속에 바늘이 사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배가 맨날 아플 리 없다. 오늘도 혜원은 할아버지에게 붙들려 옆 동네 소문난 침집으로 가는 중이다. 자전거 뒷자리에 짐짝처럼 실린 채. 자전거가 덜컹거릴 때마다 혜원의 애간장도 함께 덜커덩거린다. ‘나는 시청 동네에 사는 사람인데, 이런 흙길이 다 뭐람.’ 먼지 풀풀 나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자니 친구들 사이에서 으스대던 시내사람 자부심에 흙먼지가 소복이 쌓이는 것 같다. 혜원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배를 까고 누워 몸 여기저기에 기다란 침을 꽂는 것은 야만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시청 공무원인데, 동네 어른들이 그건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이런 야만적인 일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짜증과 두려움으로 배꼽 밑이 찌릿해질 즈음 옆 동네 침집에 도착했다. 교실 같은 넓은 방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줄 세운 인형처럼 가지런히 누워 침을 맞고 있다. 머리에 잔디처럼 침을 꽂은 인형. 사지에 빼곡히 침을 꽂아 팔다리가 도깨비 방망이 같은 인형. 손가락 끝마다 기다란 침을 꽂은 가위손 인형. 혜원은 살풍경한 모습을 곁눈질하며 노란 방바닥 끝으로 가 열을 맞춰 누웠다. 이내 혜원의 배꼽 주변으로 동그랗게 침이 꽂혔다. 사과 꼭지를 따라 이쑤시개를 꽂았다가 엄마에게 호되게 혼났던 일이 생각났다. 꼼짝없이 통각을 지배당한 사과도 속절없이 아팠겠지. 배가 안 아파야 더 이상 침을 맞지 않을 텐데. 할아버지는 이러다 다른 동네 침집까지 모두 찾아갈 기세였다. 배 속에 바늘이 있다고 고백할까. 가족들이 괴이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배꼽을 만져야 머리가 잘 돌아갈 텐데 그놈의 침 때문에 만질 수가 없었다. 혜원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침이 뽑혀질 시간을 얌전히 기다렸다. 사과에게 미안했다.



침을 다 맞고 다시 할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는 무릎으로 온 방을 옮겨다니며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혜원이 와도 본체만체 걸레를 훔치기만 한다. 아빠는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무릎으로 벽을 타고 천장까지 올라갈 것처럼 보였다. 부엌에서 압력밥솥이 칙칙 단추를 돌리고 할머니가 도마 위를 탕탕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거센 소음에도 고요히 방바닥을 구멍내듯 문지르던 엄마가 손에서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걸레를 내던졌다. 헤쳐진 걸레에서 가시가 후드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혜원은 배꼽 밑이 또다시 찌릿했다. 배 속 바늘이 살그머니 몸을 세워 인정사정없이 찔러댄다. 엄마는 걸레를 움켜쥐었던 손으로 혜원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외갓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혜원은 엄마의 손 위로 손가락을 우그려 잡았다. 뾰족한 엄마의 손이 뭉툭해지도록.


지척에 살고 있다지만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딸과, 딸의 손에 얌전히 붙들려 있는 어린 손녀. 혜원을 본 외할머니의 표정은 처마 밑 고드름처럼 얼어붙었다. 어쩐지 얼음땡을 쳐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야이야, 다 저녁 때 어쩐 일이라? 김서방은 어쩌고?”

“언니, 너 뭐야. 형부랑 또 싸웠어? 어휴, 지겨워. 저럴 거 결혼은 왜 했나 몰라.”

외할머니는 혜원의 눈치를 살피며 이모를 슬그머니 뒤로 밀어냈다. 엄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엄마의 손은 여전히 가시가 돋쳤다.


외할머니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가마솥 뚜껑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외할머니가 저녁밥을 다시 손보는 동안 혜원은 뒤란을 뱅글뱅글 돌며 배꼽을 만졌다. 소를 보고 한 번. 소똥 무덤을 보고 한 번. 손바닥 모양 초록잎이 무성하게 달린 포도나무를 보고 한 번. 배꼽을 만지며 생각했다. 엄마는 언제 올까, 아빠랑 같이 올까, 아니면 이대로 외갓집에서 살게 되는 걸까. 오른쪽 약지의 지문과 배꼽의 주름이 맞물리면 정답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닭을 보며 한 번 더 배꼽을 만지려는 찰나 개보다 큰 닭이 푸드득 날아오는 바람에 질겁하여 기회를 놓쳤다. 


이불 속에 들어가 배꼽을 원 없이 만질 수 있기까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외할머니가 차린 밥을 맛있게 먹어야 했고, 얄미운 이모의 질문에 요령껏 대답도 해야 했다. 

“혜원이 많이 먹어래이.”

“네.”

  “야, 김혜원. 너네 엄마랑 아빠는 왜 또 싸웠대? 아주 지겹다, 정말.”

  “이모는 아저씨랑 왜 만날 싸우는데? 그 아저씨가 나 인형도 사 주고. 엄청 착한 아저씨던데.” 

예상치 못한 잔망스러운 질문에 이모는 가자미처럼 눈을 흘기며 입을 다물었다. 귀찮은 질문에서 해방된 혜원은 그제야 오롯이 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엄마도 없고 두부도 없는 된장찌개인데 맛있으니 이상할 노릇이다. 외할머니의 비법 된장은 밥을 두 그릇 먹게 하는 요술을 부린다. 푸지게 먹은 저녁상을 물리자 외할머니는 마른 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 왔다. 짠 내 나는 오징어 다리를 하나 뜯어 껌처럼 질겅질겅 씹으니 오징어가 이내 흐물해졌다. 입 안 가득 짠물이 고였다. 이건 짠물일까, 짠 침일까. 짠물에 대한 정의를 고민하는 사이 혜원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긴다. ‘아, 자면 안 되는데. 배꼽 만지면서 생각해야 되는데..’ 의지는 본능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었다. 



얼마 동안 까무룩 잠들었을까 혜원은 배꼽 밑이 생경한 느낌에 눈을 떴다. 배가 여간 아픈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낮에 맞은 침이 배 속으로 뚫고 들어간 듯했다. 기다란 침이 원래 있던 바늘과 서로 배 속을 차지하려고 맹렬히 싸우는 것 같았다. 통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혜원의 몸을 동그랗게 말리게 했다. 공이 된 혜원이 데굴데굴 방 안을 구르자 덩달아 외할머니의 발도 공처럼 동동 굴렀다. 오징어의 짠물이 눈으로 흘러나왔다.

“아이고, 야가 왜 이래여. 아이고, 김서방 알면 난리나여.”                                                                                                                  

외할머니는 혜원을 둘러업고 시골길을 뛰었다. 외할머니가 보건소를 향해 달리는 동안 혜원은 엉성하게 둘러멘 보따리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할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가, 외할머니의 등이 이토록 덜커덩거리는 것은 혜원의 몸에서 바늘을 내치려는 것이리라. 혜원은 몸이 들썩일 때마다 까만 바탕에 빨간 꽃이 선명하게 그려진 스판덱스 티셔츠에 코를 박았다. 여름밤을 맞닥뜨린 외할머니의 등은 끈적했고, 마른 오징어의 하얀 분 냄새가 났다. 코를 찧으며 오징어 분 냄새를 맡을 때마다 아빠 차를 탄 것처럼 멀미가 났다. 


보건소 의사 선생님은 가스활명수를 한 병 내주었다. 외할머니는 다시 혜원을 둘러업었다. 이제 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집을 향해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혜원은 또다시 들썩이며 오징어 분 냄새를 맡아야 했다. 외할머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스활명수를 따서 혜원에게 건넸다. 혜원이 가스활명수의 마지막 방울을 빨아먹고 있을 때 반짇고리를 들고 온 외할머니가 말했다.

“혜원아, 이거는 아픈 거 아니라. 이거 찔러야 나아여.”

외할머니는 가스활명수를 들지 않은 혜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타작하듯 팔을 툭툭 쓸어내리며 엄지손가락 끝으로 힘을 모았다. 바늘을 머리 속에 넣어 슥슥 문지른 후 혜원의 엄지손가락 첫째 마디를 밀어붙이고는 망설임 없이 찔렀다. 시커멓고 똥그란 핏방울이 샘솟았다. 외할머니는 손가락을 움켜쥐고 참기름을 짜듯 마지막 한 방울까지 놓치지 않고 짜냈다. 어쩐지 무정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이러나저러나 바늘에 찔릴 운명이었나 보다. 아침에는 침을, 저녁에는 바늘을 피할 수 없는 운명. 바늘과 침의 싸움을 고스란히 받아낼 숙명. 이래서 어차피 비켜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잠자는 숲 속의 공주보다는 인어공주가 좋았다. 오로라는 마녀를 피해 숲 속에 숨어 살았지만, 애리얼은 왕자님을 만나고 물거품이 되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으니까. 운명을 욕하며 인어공주 편을 드는 동안 통증은 차츰 가라앉았다. 무정한 외할머니 무릎에 누워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듯했다.

“혜원아, 얼른 나아래이. 그러면 할매가 빵빠레 세 개 사줘여.”



다시 눈을 떴을 때 혜원의 눈 앞에 낯익은 등이 보였다. 등에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덜커덩거릴 새 없게 혜원의 등을 올올이 쓸어내리는 손길도 느껴졌다. 가시 돋친 손은 어느샌가 반드럽다. 여름밤의 시골길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혜원은 다시 등에 얼굴을 묻으며 생각했다. 배 속 바늘은 가스활명수 급류에 휩쓸려 나갔다고. 바늘과 침의 싸움은 끝났다고. 가시 돋친 손도 가시 박힌 등도 사라졌다고. 그러니 이제 더는 배꼽을 만지지 않을 거라고. 앞으로 배가 아플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배꼽친구야,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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