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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Jun 29. 2022

기름진 사랑

열한 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올리브 나무 모종을 구입했다. 피자 위에 듬성듬성 올려진 모양이 장난감 자동차의 타이어를 빼닮은 그 올리브. 결혼기념일과 올리브 나무의 관련성은 알 수 없지만 온갖 이유를 갖다붙이며 식물 모종을 사들이고 있는 요즘, 결혼기념일이라는 양질의 기회를 놓칠 리 만무하다. 한겨울의 결혼기념일, 올리브 나무가 눈에 들어온 것은 기름을 머금은 듯한 진한 초록 잎 때문이다. 짙은 초록색을 띈 뾰족한 이파리가 예민한 부잣집 도련님의 미끈한 볼 같았달까.


찐득한 초록 잎과 어울리는 회색 토분에 배양토를 넣고 올리브 모종을 옮겨 심고 보니 키가 손바닥만 했다. 나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였다. 중품으로 사는 게 좋았을 거란 후회가 들었지만 가격의 차이가 방패가 되어 들뜬 소비를 막아섰다. 어쩐지 볼품없는 올리브 화분을 들고 자리를 살폈다. 거실 한에 만들어 놓은 화단은 이미 만석이라 화분을 요리조리 밀고 옮겨야 했다. 명색이 결혼기념일 기념으로 구입한 화분인데 지하철의 좁은 좌석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아주머니인 양 올리브 화분은 시작부터 홀대받았다.


결혼 생활이라는 일상의 시작도 푸대접의 온상이다. 사귈 무렵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무조건’을 들으며 ‘네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게’라고 진지하게 말하던 남자. 쨍쨍거리는 트로트를 반주 삼아 고요히 고백하던 남자. ‘성시경’을 제쳐두고 ‘박상철’이라니. ‘좋을 텐데’처럼 사탕 같은 노래를 놔두고 꽹과리 같은 ‘무조건’이라니. 눈꺼풀이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것이 찢어지는 노랫소리 때문인지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트로트와 발라드, 박상철과 성시경의 차이에도 그때의 우리는 둘을 합쳐 ‘무조건 좋을 텐데’였다. ‘태평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라던 남자는 결혼 후 거실에서 주방까지도 달려오지 않는다. 나는 이리저리 밀려난 화분처럼 구석으로 몰려났다.


올리브 열매의 색은 익은 정도에 따라 그린에서 옐로 그린, 그린 그레이, 레드 브라운, 다크 레드, 퍼플 블랙, 블랙으로 점점 진해진다고 한다. 익은 정도에 따라 맛과 향에 차이가 있고, 또 같은 품종이라도 재배되는 지역의 환경조건(테루아)에 따라 맛에 차이가 난다고 한다.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을 가진 올리브처럼 한 사람의 스펙트럼은 드넓다. 한 공간에서 일상의 전반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기 전에는 상대의 광활한 스펙트럼을 통째로 알 수 없다. 연애는 더듬이가 오롯이 내 쪽으로 향해 있는 모습만을 뚝 떼어낸 단면일 뿐이다. 서로 동일한 품종이라 끌렸겠지만 익은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본격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깨닫게 된다.

안과 밖이라는 테루아도 차이를 만든다. 안에 있는 사람은 밖을 모른다. 밖에 있는 사람은 안을 모른다. 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바람을 타고 들어온 신선한 공기로 하루의 정적을 깨트리고 싶다. 밖에 있는 사람은 하루치의 북적임을 버리고 안으로 고요히 들어가고 싶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안의 여자. 거실 소파에 파묻혀 캔커피를 홀짝이며 TV만 보고 싶은 밖의 남자. 결혼 생활은 두 사람의 간극을 넓히는 확장 공사다.



고독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당신은 독락당獨樂堂에 우뚝 세워놓았습니다 오늘은 독수정獨守亭이 고독을 지킵니다 처음으로 즐기는 것이 지키는 것과 정도 차이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내 의견에 한 의견을 슬쩍 올려놓고 보아요 그래도 다른 것은 다른 것이고 내 생각 깊은 자리 한 생각 잠시 머뭇거려도 그 자리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요 저 자연스러움과 자유스러움의 차이 그 차이로 차별 없이 당신과 나는 당신과 나를 견뎠겠지요 다르다와 틀리다 사이에서 한나절을 또 견디겠지요

[*]



결혼 생활은 상대의 넓은 스펙트럼을 촘촘히 느끼며 차이가 주는 고독을 즐기고 지키는 것이 아닐까. 어느 날 아침, 냉장고 안에 스타벅스 돌체콜드브루 그란데 사이즈 한 잔이 놓여 있었다. 평소 믹스 캔커피를 박스째 쟁여 두고 마시는 남자가 유려하여 발음하기도 어려운 커피를 사다 놓았다. 야구 전광판 같은 암호투성이 메뉴판 앞에서 눈꺼풀을 깜빡이며 버벅댔을 그 남자의 모습이 선연했다. 결혼 생활은 확장 공사로 넓어진 틈을 서로의 방향으로 조금씩 메워가는 보수 공사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믹스 캔커피와 스타벅스 커피의 차이를 서로 깊게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오르락내리락 같은 자리를 계속 돌고 도는 회전목마처럼 결혼 생활은 인생의 회전목마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같은 곳을 계속 맴돌면서 이어질 것이다.


올리브 나무에 열매가 열리려면 10~15년의 성장기를 거쳐야 한다고 한다. 남편과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한 번 더 지나야 열매가 열리다니 이 작은 화분은 이제 막 버진로드를 걸어 나온 신혼부부와 다름없다. 나무가 테루아에 적응하고 성장기를 거쳐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차이를 견디며 성장한다. 거실 화단에 작게 자리잡은 이 나무가 견디며 머금을 우리의 시간은 얼마나 기름질까. 올리브 오일처럼 진한 농도의 관계를 짜내는 진득한 시간이기를.


          

[*]천양희, 시집「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中 차이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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