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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처럼 스치는

눈치 없는 봄눈

by 임반짝 Mar 20. 2025

 두꺼운 코트가 따분하고 두툼한 패딩에 싫증이 날 때쯤 새 연인처럼 봄이 온다. 캐시미어 100% 니트 위에 양모 60%, 캐시미어 40%의 울 코트를 겹쳐 입어 만들어낸 포근함이 아닌, 따사로운 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는 진짜 포근함이 오는 것이다.     


 내게 봄의 시작은 입춘도 경칩도 아닌, 목련이다. 상앗빛의 목련이 한껏 피어날 때,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처럼 나도 봄의 기지개를 켠다. 목련은 갓 태어난 새끼 새가 옹송그린 듯한 모양새로 한겨울에 꽃망울을 맺는다. ‘벌써부터 꽃망울을 맺어서 어쩌자는 거지?’ 잔뜩 옹그린 자세로 겨우내 찬 바람을 맞고 있는 목련 꽃망울을 보면 어쩐지 안달이 난다. 나의 봄이 저러다 똑 하고 떨어질까 봐.      


 웅크린 채 긴긴 겨울을 난 목련 꽃망울은 포근한 봄바람이 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망울을 터트린다. 밀도 높은 상앗빛의 새틴이 꽃잎인 척 가지 위로 피어난 것 같다. 이파리도 없이 마른 가지 위로 저 혼자 피어난 것이 고고하기까지 하다. 한껏 피어나 오래도록 저를 뽐낼 만도 한데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저문다. 목련이 피어나면 내 마음도 벌렁댄다. 그 짧은 화양연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SNS에서 실시간으로 목련의 개화 상황을 뒤지고 달력을 쥐어짠다. 이른바 꽃 사냥의 시작이다. 목련의 화양연화가 내 것인 양 ‘꽃가면’을 쓰기 위해.   

  

 “여보! 얘들아! 드디어 다음 주 토요일이야!”

 “뭐가?”

 “목련 사냥을 떠나는 날!”

 “…….”

 남편과 아이들은 또 시작되었다는 듯 어쩐지 체념한 눈빛이었다.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 속에서 나 혼자 이방인이 되어 신나게 떠드는 꼴이 자못 애처로웠다. 그때 첫째 아이가 그날 자신은 친구와 선약이 있다고 했다. 온 가족의 나들이에서 본인은 제외하라고 태연히 말했다. 수년째 함께한 가족 행사를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훌렁 내던지는 아이가 낯설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드디어 봄인데 주말마다 가족끼리 같이 놀러 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난사하듯 말을 쏘아댔다.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진 아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주 토요일, 지난해와 같은 날짜에 경주 오릉을 찾았지만, 눈치 없는 꽃샘추위에 듬성듬성 핀 목련 꽃잎은 그마저도 냉해를 입고 갈변된 상태였다. 한옥과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목련 옆에서 사진을 남기고 싶었던, 이방인처럼 나 혼자 우겨댄 소망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겨우내 찬바람도 꿋꿋하게 버텨낸 목련의 ‘고귀함’은 찾아볼 수 없는 모양새였다. 채 피지도 못한 채 볼품없이 가지에 달린 모습이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마지못해 따라온 첫째 아이 같았다.         


  

 중학생이 된 첫째 아이는 지난겨울 동안 제 방에서 웅크린 채 나오지 않았다. 방문을 열면 “왜?”라며 용건부터 찾았다. 아이에게 나는 제 방문을 마음대로 열고 들어오는 침입자였다. 마치 남의 집 문을 제멋대로 열고 들어오는 불쾌한 이웃이 된 것 같아 얼굴이 홧홧해졌다. 홧홧한 얼굴은 활활 타는 불길로 뿜어져 나왔다. “도대체 방에서 혼자 뭐 하는 거야? 하루 종일 핸드폰만 보고 있는 거야? 방 꼴이 이게 뭐야? 옷 정리 똑바로 안 해? 가방은 왜 또 바닥에 나뒹굴고 있어? 숙제는 다 한 거야? 숙제만 하면 다야? 공부는 도대체 언제 할래? 정말 뭐가 되려고 그래?” 입을 다문 아이에게 물음표를 화살처럼 쏘았다.     



 초라한 목련을 뒤로 하고 오릉의 길을 따라 걸었다. 알을 깨고 태어나 신라의 첫 번째 왕이 된 박혁거세의 몸이 죽은 뒤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다섯 개의 무덤이 되었다는 곳. 알과 다섯 개의 무덤이라는 설화는 어디서 온 것일까? 여섯 개의 촌락을 한 나라로 묶어 다스려줄 강력한 통치자를 원했던 백성들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설화에 설화를 더하니 눈앞에 펼쳐진 무덤이 어쩐지 아득했다. 아이가 ‘무엇’이 되길 바라는 소망은 어쩌면 설화 같은 환상일 것이다. 환상의 끝은 환멸이다. 다섯 개로 조각난 박혁거세처럼 아이의 마음이 조각나 여기저기 묻힐지도 모를 일이다.


 눈치 없이 내린 봄눈은 새 계절에 새롭게 피어나는 꽃의 앞길을 막는다. 겨우내 잔뜩 웅크린 채 힘을 비축한 꽃망울이 세상을 향해 꽃잎을 펼치자마자 맞은 꽃샘추위에 곧장 볼품없이 초라해진다. 봄눈을 맞은 목련이 ‘고귀함’이라는 제 꽃말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갈변된 것처럼. 만개한 적 없어 봄마다 ‘꽃가면’을 쓰려고 꽃 사냥을 나서는 나와 달리 아이는 알을 깨고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 만개하길 바라면서도 아이에게 나는 정작 때를 모르고 내린 봄눈이었다.      


 닫힌 방은 아이의 알이자 꽃망울일지도 모른다. 겨우내 웅크렸던 꽃망울을 터트리고 꽃잎이 피어난 것처럼, 웅크렸던 아기 새가 날개를 펼친 것처럼, 지금 아이는 제 방에서 웅그린 채 밀도를 높이다 알을 깨고 팔을 세상 쪽으로 뻗는 중일 것이다. 방문 안쪽에서 밤새 라디오를 들으며 나를 가족과 분리했던 어릴 적 나처럼. 불시에 열린 방문에 다른 세계로 연결된 문이 사라지는 것을 가장 경계했던 그때의 나처럼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웅크린 밀도의 시간 후에 알을 깨고 세계로 나간다. 꽃망울을 터트려 화양연화를 찾는 것도 각자의 몫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이든. 아름다움이 짧든 혹은 길든. 만개한 적 없어 꽃의 화양연화를 빌려 쓴 것 또한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일 수 있으니 봄에는 다만 나의 ‘꽃가면’을 쓰자. 다만 봄바람같이 아이를 스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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