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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방

자기만의 방

by 임유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여성이 소설을 쓸 수 있으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사방이 벽으로 가리어진 네모 한 칸. 방은 한 사람의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나와 남편,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이 사는 집은 방이 세 개다. 공급면적 115㎡에 방 세 개, 거실 하나인 집에서 4인 가족이 각자 방 하나씩 차지하고 들어가 문을 닫으면,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한 사람은 혼자 거실에 남을 수밖에 없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붙지 못하는, 놀이가 끝난 후의 깍두기처럼. 닫힌 방의 문 앞에서 잠시 그 안을 상상해 보다가 문이 잠긴 것을 알았을 때의 기분은 처참하다. 독립된 개체로서 자기만의 삶을 펼쳐나가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자기만의 방이 어쩐지 ‘각방살이’가 된 듯하다.


나는 방에서 자랐다. 여러 방을 거치면서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기억 속 첫 방은 화원. 꽃동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의 한국식 주택이었다. 칠이 벗겨진 회색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앙에 마당과 샘이 있고, 샘 옆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두꺼운 시멘트 계단이 있었다. 마당 왼쪽으로는 주인집 식구들이 한 명 한 명 진짜 주인으로 살았을 안채의 문이 나란히 있었고, 그 문들을 지나 마당과 샘 사이의 작은 길로 들어가면 주인집과는 분리된 하나의 방문과 그 옆으로 부엌문이 있었다. 엄마는 내가 그 단칸방의 벽에 겨우내 질리도록 까 먹은 귤과 똑같은 색의 똥을 그림처럼 발라 놓았다고 했다. 한겨울 빨래에 꽁꽁 언 손이 귤똥을 닦아내느라 녹았다고.

하지만 내 기억은 그곳의 부엌이 먼저다. 방문을 열고 시멘트 계단에 놓인 신발을 신고 나가 옆문으로 이동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부엌. 낮에도 어두컴컴한 부엌의 위쪽에는 직사각형의 작은 창문이 나 있었다. 나는 내 눈높이로는 볼 수 없는 그 작은 창문의 바깥이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창문 밑에 테트리스처럼 조밀하게 쌓아놓은 ‘바께쓰’를 밟고 창틀에 매달렸다. 유아기 어린아이의 모험이 늘 그렇듯 바께쓰는 넘어지고 그 안의 미숫가루가 부엌의 시멘트 바닥 위로 쏟아졌다. 가루가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퍼지며 작은 부엌 안에 ‘꼬신내’가 차올랐다. 동시에 내 두 눈에도 물기가 차올랐다.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지금도 비싼 미숫가루가 그때는 쌌을 리 없다. 나는 두 손으로 삽을 만들어 미숫가루를 바께쓰에 쓸어 담았다.


그 후 엄마가 스텐 대접에 얼음 띄운 미숫가루를 주었을 때 내가 먹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부엌 창문의 바깥 풍경 역시 기억에 없다. 나란한 문들이 있었던 그 집에서 나와 부모님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딱 두 개뿐이었지만, 충분했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나무인 척하는 주황색 페인트칠 위로 바니시의 반짝이는 눈물 자국이 있는 문과 어두컴컴한 부엌 안으로 들어오는 짧은 빛줄기, 그리고 귤똥 때문인지 누렜던 벽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부모님의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삼백의 고장’은 시장이 곧 시내였다. 조부모님의 집은 시내 한복판에 있었지만, 화원에서의 집과 마찬가지로 대문 옆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마당 한편에 무쇠로 된 펌프와 수도꼭지가 함께 달린 샘이 있는 전형적인 한국식 주택이었다. 연탄보일러와 가스레인지가 놓인 부엌은 바깥이라 신을 신어야 했다. 그 부엌과 이어진 안방이 전체 건물의 왼쪽에 있고, 안방 부엌보다 작은 부엌이 달린 작은방이 오른쪽에 있었다. 안방과 작은방 사이에 창고 같은 속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앞으로는 작은 마루가 있어 세 방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마루는 현관이자 거실이었다. 여름에는 모시 러닝셔츠와 고쟁이를 입고 마루에 다 같이 앉아 수박을 먹고, 추석에는 송편을 빚었으며, 닭을 푹 삶은 날에는 ‘오봉’에 통째로 담아 손으로 찢어 먹었다. 엄마가 찢어주는 다리 살이 누구 입에 더 많이 들어가는지 눈으로 좇으며.


부모님과 나와 동생은 오른쪽의 작은방에서 함께 지냈다. 작은방에는 다락이 하나 있었는데 입구가 천장 쪽에 가까이 있어 내 키로는 오를 수 없었다. 게다가 뱀이 똬리를 튼 술병이 다락문의 바로 앞에 있어서 문을 열어 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부모님 방의 다락에 주로 올라갔다. 안방의 다락은 두 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랫단은 윗단으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계단치고는 폭이 꽤 넓어 할머니의 반짇고리와 할아버지의 약통 같은 것들이 보물 상자처럼 쌓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기침을 하면 다락의 왼쪽 미닫이문을 열어 판피린을 한 병 꺼내 주었고, 괴물의 시커먼 아가리 속으로 떨어질까 봐 쪼그리고 앉은 다리가 떨려 볼일에 실패하면 변비약을 꺼내 주었다.


다락의 오른쪽 미닫이문을 열어 아랫단을 디디고 윗단으로 올라서면 어딘가 친숙한 냄새가 났다. 다락의 벽은 빨간색 보자기에 싸인 큼지막한 무언가 위로 초록색 보자기에 싸인 작은 덩치의 보따리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나는 집안 전체에 밴 냄새의 진원이 그 보따리들이라고 생각했었다. 보자기를 풀어 보고 싶었지만, 알록달록한 그 켜들을 들출 힘이 어린 나에게는 부족했다. 눌리고 눌려 단단해진 듯한 보따리를 베고 바닥에 누우면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유영하는 먼지가 보였다. 먼지는 그곳의 주인 같았다. 다락 탐사 후에는 아랫단에 있는 분유통을 열어 가루를 한 숟갈 퍼먹었다. 할머니가 돌봐주던 사촌 동생의 분유 가루는 뽀드득 소리를 내며 입안에서 뭉쳐졌다. 나는 혓바닥에 눌어붙는 상앗빛의 가루를 사탕처럼 빨아 먹으며 다락을 내려왔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 아빠는 나의 미미인형을 버리려고 했다. 미미를 가지고 놀 나이는 이제 지났다고. 나는 그날 밤 아빠 몰래 미미를 캄캄한 다락의 윗단으로 던졌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다락에 올라가 미미를 찾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미미와 손수건에 싼 미미의 옷 보따리를 알록달록 보자기들 사이에 끼워 넣었다. 보따리에 흡착된 먼지들이 한 움큼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미미를 숨겨주었다. 한 방에서 한 식구가 함께 살았던 나날, 다락은 나 혼자만의 방, 보물창고였다.



열 살이 되는 봄, 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다시 이사를 왔다. 가로수마저 감나무인 곶감의 땅에서 사과의 땅으로. 자전거가 각자의 이동 수단인, 시장이 곧 시내였던 소읍과 달리 지하철 공사가 한창인 그곳은 ‘사과직할시’에서 ‘섬유광역시’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섬유광역시’에서의 집은 20평의 4층 빌라였다. 화장실 아니 정확히는 욕실이 집 안에 있는 ‘황실빌라’는 이름처럼 생활을 호사스럽게 바꾸어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변기에 앉아서 볼일을 보고 바로 옆 세면대에서 샤워기의 물을 틀어 머리를 감을 수 있었다. 황실빌라는 허벅지에 해방을 가져왔다. 똥통에 빠지지 않으려고 볼일 보는 내내 쪼그린 다리에 힘을 줄 일도, 고무다라이에 받아놓은 물을 세숫대야에 바가지로 퍼담아 쪼그린 다리 사이로 머리를 숙여 넣으며 머리를 감을 일도 없었다.


가장 큰 변화는 각자의 방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각자의 방이라는 독립된 공간은 방 주인들에게 하루의 시간을 늘려주었다. 엄마가 불을 끄는 것과 동시에 다 같이 잠들지 않아도 되는 밤의 시간은 선물 같았다. 침대는 자기 전에 이불을 깔고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개어 서랍장 위에 올려야 하는 노동을 덜어주었고, 언제든 드러누울 수 있는 안락함을 주었다. 나는 황실빌라의 내 방 침대에서 혼자 자고 혼자 일어나며 자라났다.


할머니 다락의 보따리처럼 내 방은 곧 나로 쌓였다. 책상 서랍 안에는 그냥 일기장과 비밀 일기장, 친구와의 교환 일기장이, 침대맡 선반에는 H.O.T.와 이소라, 자우림, 이적, 토이의 CD와 테이프들이 켜를 이루고, 벽에는 이재원의 포스터가 또 하나의 창문처럼 붙었다. 낮이고 밤이고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포스터 아래 벽에 이야기를 써나갔다. 이재원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소라의 ‘그 남자 그 여자’, 이재원을 실제로 만나서 ‘그 남자 그 여자’ 같은 사랑을 하려면 서울에 있는 대학,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해 방송국에 취직해야겠다는 이야기들이 까만 글씨로 벽에 들어찼다. 화원의 방 벽에 귤똥을 바른 것처럼 내 방 벽에 꿈을 발랐다.


여름이 혹독한 도시의 밤, 차가운 벽에 붙어서 자고 일어나면 팔꿈치에 하얀 반짝이가 묻어 있었다. 내 꿈들은 조악한 벽지에 머물렀다가 그렇게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그 방에서 나는 어린이에서 청소년을 거쳐 자전거는 못 타지만, 지하철의 개찰구가 두렵지 않은 ‘광역시민’이 되었다. 내가 결혼으로 그 방을 떠나며 다시 ‘경북도민’이 되었을 때 나의 ‘꿈벽’은 새 벽지로 완전히 덮였다.



결혼하고 새로 생긴 방에서 나는 벽에 이야기를 쓰는 대신 산모수첩을 썼다. 수첩의 주인공은 벽지가 아니라 기저귀를 향해 황금똥을 분사했다. 나는 엄마처럼 벽을 닦는 대신 아기의 엉덩이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씻겼다. 혼자만의 방에서 다시 두 명, 세 명, 네 명이 함께 살아가는 방으로 회귀한 것이다. 다만 역할이 변한 채로. 이 방에서 나의 자람은 멈춘 것일까? 나는 아기의 울음이 배고픔 때문인지 잠 때문인지 축축한 기저귀 때문인지 기분과 상황을 헤아리며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이를 먹이고 키우는 법을 배웠다. 누워 있던 아기가 앉고 기고 걷고, 또 다른 아기가 태어나 앉고 기고 걷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동안 한 방에서 아기는 아이로, 나는 엄마로, 남편은 아빠로, 우리 넷은 무럭무럭 자랐다. 네모 한 칸에 각자의 꿈벽을 세워 만든 방 안에서 함께 무럭무럭.


방은 나를 키웠다. 자라면서 거쳐온 방들은 생애 마디마다 나를 키웠다. 언제고 그랬듯 앞으로의 어떤 방도 나를 키울 것이다. 다락방의 고무비닐장판에 밴 눅눅한 냄새와 단단하게 눌린 보따리들의 이야기처럼 녹진한 냄새를 피우는 내 이야기를 써 나갈 것이다. 한방살이에서 각방살이가 된 지금, 나보다 조금 이르게 자기만의 방을 가진 내 아이들은 자신들의 다락방에서 어떤 어른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나는 중일까? 바니시의 눈물 자국이 없는 매끈한 문 안쪽에서는 소망하는 이야기가 벽 한가득 써지고, 꿈의 보따리들이 켜켜이 쌓이고 있겠지. 방문이 닫힌 것은 자신들의 꿈이 틈새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겠지. 방은 탐사의 공간, 배반의 공간, 연루의 공간, 성인식의 공간이니까.


거실 창문에 붙어 있는 책상에 나의 보따리들을 올려두고 앉아 양쪽으로 나란한 닫힌 문들의 안쪽을 가늠해본다. 가만한 문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자람을. 벽만이 지켜볼 수 있는 자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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