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반짝 Aug 18. 2022

똑똑똑 앨리스

아홉 살 난 H는 늦되어서 뭐든 더디다. 목욕을 마치고 고사리손으로 한참 로션을 바르는데도 배에 한 줄, 허벅지에 한 줄, 종아리에 한 줄, 도로를 가르는 중앙선처럼 한 줄만 그어져 있다. 엄마가 언제까지 발라 줘야 해? 사뭇 고단한 척하지만 찹쌀떡 같은 몸을 만지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이때만큼은 얌전히 몸을 내맡겨주니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는 혜택도 있다. 로션 뚜껑을 닫고 돌아보니 H는 팬티를 입는 중이다. 뒤집어서 입는 줄도 모르고 깨금발을 지어가며 한 다리씩 넣는 폼이 자못 진지하다. 흔들리는 엉덩이가 말캉하게 말을 걸어온다. 엄마, 나 귀여워요?


H를 향한 무구한 애정이 어긋난 모정으로 이어질까 문득 마음에 불시 검문이 들어왔다. 결혼 초, 시댁 거실에 나와 남편, 시어머니가 마주앉아 가늘게 대화를 이어갔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느라 광대가 어그러지는 듯했다. 할 말이 없으면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며느리’ 직분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관객의 바람을 잡는 코미디언이 따로 없었다. 입담이 터지지 않을 땐 볼이 달아 귀 끝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때마침 과일을 집느라 팔을 뻗는 남편의 빼꼼 열린 등 뒤로 뒤집어진 팬티가 보였다. 몇 살인데 속옷을 뒤집어 입느냐고 놀리면서도 말거리가 생긴 것에 안도했다.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깔깔거리며 남편의 팬티를 가리키자 나무라는 눈빛이 돌아왔다. 어째서 이런 걸 챙기지 않았는지 타박하는 눈빛. 옹그리며 웃다가 그대로 얼음이 됐다. 무대 밖으로 내몰린 광대의 어그러진 광대가 홧홧하다. 28세 남편의 팬티 착장 상태를 체크하지 않은 이유로 나는 순식간에 삿된 아내가 되었다.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빨려 들어간 앨리스처럼 모든 게 이상했다. 남편은 만성 구내염에 시달렸다. 앓는 남편이 못내 애달팠던 시어머니는 수소문 끝에 프로폴리스를 구해서 보내셨다. 하루에 세 번, 입 안에 세 방울. 똑똑똑 떨어뜨려 주라는 지침은 내게로 떨어졌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 때문에 남편은 먹기는커녕 보는 것도 질색했다. 나는 어미새가 아기새에게 먹이를 넣어주듯 똑똑똑 세심하게 스포이드를 조절했다. 시어머니는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하셨다. 입 안에 똑똑똑 떨어뜨려 줬느냐, 효과가 있느냐 확인하고 안심을 얻으셨다. 구내염을 앓는 것도 약을 먹어야 하는 것도 남편인데 실행과 보고는 내 몫이었다. 이상했다. 이상한 나라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불시착한 앨리스가 불순분자다. 나는 그곳에서 자기가 흘린 눈물 웅덩이에 빠진 앨리스였다.


‘나’에 ‘아내’가 더해졌을 뿐인데 ‘남편의 엄마’가 되었다. 정작 내 아이는 아직 배 속에 있는데. 이상한 나라는 나를 종종거리게 했다. 대화가 끊기지 않게 하려고 종종. 남편에게 약을 먹이려고 종종. ‘며느리’ 거푸집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 종종거림을 장착했다. 발바닥의 지문이 닳아 없어질 정도다. H가 장성하면 나도 ‘시어머니’가 될까. 언제 어디서든 목을 치라 명령하는 하트여왕이 되어 이상한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게 될까. H의 엉덩이가 사랑스러워 깨물어주고 싶지만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도 엉덩이를 만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인 아이는 무구한 애정을 품게 하는 존재다. 기꺼이 살을 떼어줄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이 아들이 되는 것은 내 영혼의 빛을 차단당하는 일이다. 아들이 된 남편은 영혼의 동반자가 아니라 영혼을 갉아먹는 생쥐가 된다.


어느 날 불시착한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이 커졌다 줄었다 변한다. 눈 앞에는 늘 새로운 문이 있다. 정신을 오롯이 붙들기 힘들 것 같은 상황에도 앨리스의 당황은 오래가지 않는다. 오히려 물병의 약을 마시고 버섯을 주워 먹으며 몸을 자유자재로 줄이고 키워 이상하고 신기한 상황을 즐긴다. 이상한 나라의 방식을 알아차린 후부터는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말하고 무례한 것은 무례하다고 응수한다. 이상한 나라를 순례하면서 앨리스는 자신을 잃지 않는다.


‘여기서 나가는 길 좀 알려줄래?’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오래 걷기만 하면 분명 어딘가에 도착할 거야.’

[†]


이상하고 커다란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일. 영혼에 둘러쳐진 차양막을 걷어 빛을 되살린다. 종종거림 대신 앨리스처럼 사뿐하게 걷는다.


똑똑똑. 앨리스, 거기 있니?





          

[*] 나혜석, 「모(母)된 감상기」




[†]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中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의 대화



작가의 이전글 배꼽 만지는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