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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중아 Jan 05. 2022

제주 한달살이, epilogue

2021년 가장 반짝반짝했던 제주에서의 한 달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온 이후,

나는 매일 잿빛 도시의 무색무취한 일상 속에서 제주의 푸른 오름과 은빛 바당을 앓았다.

마음 한켠에는 얼른 에필로그를 써서 연재 깔끔하게 매조 짓고 싶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느껴졌지만 다른 한켠으로는 시리즈의 끝과 함께 나의 제주살이도 영원히 기억 속 봉인될 것만 같은 이상한 두려움으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러다 우야무야 2022년 새해가 밝았고, 나는 문득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를 흥얼거리다 마침내 나의 제주를 갈무리하려 한다.



#1 신발 속 돌멩이

비가 흠씬 내린 다음 날, 나는 곶자왈의 자연휴양림을 걸었다.

축축하게 젖은 흙길을 걷다 보니 작은 돌멩이들이 등산화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도톰한 등산양말을 신고 발목까지 오는 등산화의 신발끈도 꽉 조여맸는데 도대체 어느 틈으로 들어간 것인지 신기할 지경이었지만 아무튼 그 돌멩이들은 나의 신 속으로 뛰쳐들어와 기어코 나의 걸음걸음을 성가시게 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심히 그냥 걸었다.

아래쪽부터 당겨가며 야무지게 꽁꽁 동여매 둔 신발끈을 다시 낱낱이 어헤치양손으로 한 짝씩 힘껏 당겨 은 다음 신발을 뒤집어 들고서 바닥에 탁탁 털어줘야 하는, 사실은 별것 아닐 그 과정이 막상 시작하기엔 번거롭고 귀찮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돌멩이들이 시나브로 하나하나 늘어나더니 내딛는 발걸음마다 점점 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더해갔다.

급기야 거의 절뚝이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나는 주변을 살핀 뒤 자리를 잡고 신발을 벗기 시작다.

신발을 거꾸로 쥐고 탈탈 털어내며 경쾌하게 떨어지는 작은 멩이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곳 제주에서, 내 삶의 성가신 작은 돌멩이들을 이제야 털어내고 있는 게 아닐까.

어느샌가 우상이 되어버린 얄팍한 사회적 지위도, 잠시나마 곁을 내어주었지만 결국엔 서로 비껴간 인연도, 남들처럼 혹은 남들만큼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부담도,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그냥 불편한 걸음으로 꾸역꾸역 내디뎌왔던 건 아닐까.

이제서야 이곳 제주에 멈춰 서서, 나는 렇게 신발 속 자잘한 돌멩이들을, 마음속 성가신 앙금들을 탈탈 털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그렇게 애꿎은 신발을 한 번 더 탁탁 내리쳤다.



#2 행복 총량의 법칙

나는 평소 내가 먹을 것에 진심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라면 하나를 끓여먹어도 파송송 계란탁에 묵은지까지 꼭 구색을 갖추, '내가 나를 대접할 줄 알아야 남도 나를 대접한다'라는 신조로 혼자 밥을 먹어도 번거롭게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공을 들여 요리를 하고 예쁜 그릇에 담아 먹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로 돌아와서야 나는, 막상 나의 제주의 일상에서 맛있는 음식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친구가 방문했던 기간 외에 나 혼자 지내던 일상에서는 딱히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재료를 손질해가며 지지고 볶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은 식도락(樂)이라고 노래 부르던 내가 정작 갖가지 먹거리가 풍부한 제주에서 먹을 것에 그렇게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다 문득 '행복 총량의 법칙'이 떠올랐다.

사람에겐 각자에게 할당된 행복과 불행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행복 총량의 법칙'.

보통은 사람의 일생 전체를 놓고 행복의 총량을 논하곤 하던데, 나는 제주에서의 날들과 서울에서의 날들이 확연히 대비되다 보니 쉽게 하루를 기준으로 행복의 총량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상 속에서 매일 채워져야 하는 행복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전제 하에 제주에서의 나의 일상은 굳이 맛있는 음식을 찾지 않아도, 식도락 외에도 나의 행복을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이 아주아주 많았다.

매일 똑같이 뜨고 지는 해만 봐도 마음이 벅차오르고, 짭조름한 바닷바람만 불어와도 가슴이 뻥 뚫리고, 각양각색의 매력으로 나를 놀래키는 크고작은 오름들까지...

그것만으로도 나의 하루치 행복할당량은 차고 넘쳐서 굳이 맛있는 음식을 찾는 수고로움까지 더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뒤, 나는 어느새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오고 있었다.

점심은 무엇을 먹을지,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아침부터 고심했고, 무엇을 먹을지 정하고 나서도 그럼 어떻게 먹는 것이 가장 맛있을지에 대해 연구했다.

그렇게 나의 하루의 행복을 어떻게든 꾹꾹 채우려고 아등바등거리면서 한편 슬며시 서글퍼지기도 했다.

단순한 먹는 즐거움 외에도 나의 행복은 얼마든지 여러 모양으로 채워질 수 있을 터인데, 지금 당장 내게 허락된 행복은 그저 식도락뿐임에 어쩐지 그 작은 성취마저 조금 초라해진 기분이 들었다.


2022년, 새해에는 나의 하루치 행복이 좀더 다채로운 빛깔로 채워질 수 있기를,

비록 나의 제주와는 이렇게 작별하지만, 나의 서울을 매일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아낼 수 있기를,

그렇게 부지런히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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