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머털도사, 기영이, 김계란
늦여름, 이주일 있다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나는 찬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1차 항암이 끝나고 어느 정도 수치가 회복되면 다음 항암을 견딜 체력을 만들기 위한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던 퇴원이었건만 막상 집에 가려니 살짝 걱정이 되었다. 이런 몸으로 집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아이들에게 아픈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미안했고 안 그래도 휴직까지 하며 아이들 돌보느라 애쓰는 신랑에게 나까지 짐을 더해주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내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 하고 소리치며 와락 안기는 아이들의 온기와 살 냄새를 느끼며 여기가 진짜 우리 집이구나 실감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우리 딸들…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재에도 잘 지내며 기다려 준 아이들이 너무 고맙고 안쓰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들과 실컷 놀아주고 못다 한 집안일들도 해치우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퇴원하고 며칠간은 침대에서 나오지를 못하고 밥도 잘 못 먹었다. 하지만 신랑이 손수 차려주는 따끈한 밥과 엄마가 해다 주시는 갖가지 먹거리들의 힘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입맛이 돌아오고 체력도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얼마 후에는 신랑과 함께 산책이며 걷기 운동도 할 수 있었고 가끔 외식도 하고 커피숍에도 갔다.
정말 오랜만에 아이들과 놀이터에도 출동하고 빨래며 청소며 집안 일도 거들 수 있게 되자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신랑도 엄마 아빠도 내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다며 좋아했다.
정말 내가 아픈 사람이 맞나? 꼭 다 나은 것만 같아 다시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무렵, 듬성듬성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내 처지를 상기시켜 주곤 했다.
항암을 시작하기 전 대부분은 머리를 밀고 온다는데 난 갑작스러운 입원과 항암 덕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항암을 시작하며 머리가 빠진 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는 건 그 어느 항암 부작용 이상의 충격이었다.
돌돌이로 처리할 정도로 간간이 빠지던 머리카락은, 내 혈액 수치가 바닥을 찍고 감염의 우려로 1인실로 옮겨진 그날부터 미친 듯이 빠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나도 모르게 빠지는 게 아니라 정말 순식간이었다. 손으로 넘기기만 해도 쑥쑥 빠지다가 머리를 감으려고 샤워기를 대자 한 뭉텅이가 빠졌다. 어느 날은 링거를 달고 최대한 조심히 샤워를 하다가 사달이 났다. 한 번 빠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마법의 실타래처럼 아무리 헹궈도 헹궈도 계속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급기야는 빠진 머리카락이 뭉치고 뭉쳐 손가락 사이에서 걸려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대머리가 될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나는 하는 수 없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금방 머리 한구석이 휑해졌다. 화장실 바닥에 늘어진 머리카락들이 꼭 누군가의 주검 같았다.
서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혼자 울며 바닥을 치우는데 갑자기 바닥 아래에 흥건한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혼비백산을 하며 살펴보니 어느새 링거가 빠져 있었다. 정신없이 머리카락을 치우며 몸을 움직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링거 줄이 당겨진 것이었다. 새빨간 피가 주는 공포는 엄청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비상벨을 누르고 황급히 수건으로 알몸을 가렸다. 구세주 같았던 간호사 두 명이 달려와 나를 안심시키고 빠진 링거를 다시 달아주었다.
병원에서 제일 많이 놀라고 운 날이었다. 하지만 내가 대머리가 된 그날 1인실에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공용 샤워실이나 기존 병실에서 그런 일을 당했을 걸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그렇게 겨우 몇 가닥만 살린 머리는 퇴원해서도 열일을 했다. 모자를 쓰면 모자 아래로 살포시 내려앉은 내 진짜 머리카락이 감쪽같아서 아무도 내가 대머리임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우리 막내 역시 얼마 남지 않은 내 머리카락을 애지중지했다. 내가 처음 모자를 벗고
"엄마 머리 너무 웃기지?" 하고 물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충격의 도가니였다.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안타까운 눈빛의 그녀는 "그래도 엄마는 예뻐." 라며 내 머리를 쓰담쓰담해주었다.
그리곤 방으로 뛰어가 알록달록 삔이며 머리띠를 가져와
"이거 꽂으면 엄마가 더 이뻐질 수 있어." 라며 나를 꾸며주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으로 내 사진도 찍어주었다. 저절로 화장도 되고 새로운 머리스타일을 할 수도 있고 세상 화려한 모자를 쓸 수도 있는 마법 사진이었다.
그렇담 우리 첫째는 어땠을까? 그녀는 모자를 벗은 내 모습을 보자마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 못하고 꺽꺽거렸다. 나름 엄마의 아픔인데 찐 웃음이 라니..
그렇지만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이제 알 것 다 아는 초등 6학년에게 지금의 상황이 녹록지 만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맘껏 웃을 수 있고 해맑을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감사하게 다가왔다.
2차 3차 항암을 하며 결국 난 머리를 다 밀었고 중간중간 휴가를 갈 때마다 아이들은 내 머리를 만지고 구경하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해맑은(?) 큰 아이는 날 볼 때마다 자지러지게 웃으며 내 별명을 만들어주었다.
처음엔 머털도사였다가 나중엔 ‘검정 고무신’에 나오는 기영이 같다고 했다가 또 어느 날엔 김계란 을 닮았다고 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대머리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럴 때마다 나도 응수했다.
첫째야 너 세 살 때 엄마가 어떤 초등학생오빠랑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네가 그 오빠한테 뜬금없이
“오빠 어디가?”라고 묻는 거야. 근데 그 오빠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야! 형한테 왜 오빠라고 불러?” ㅋㅋㅋ
그때 우리 딸도 머리카락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환자인 듯 아닌 듯 집에서 보낸 나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행복했다. 다시 입원해야 할 때의 심정은 점점 더 쓰라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