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를 시작한 지 10개월 차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가을부터 지금까지 안개 낀 꿈속을 헤매듯 유난히 먼 길을 돌아온 느낌이다. 처음 내가 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병원 생활을 거듭하면서 행불행의 순간을 참 많이도 오갔다.
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불행 중 다행’이다 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특별한 증상 없이 조기에 발견한 것, 내 암세포가 항암제에 반응했던 것, 남편이 휴직해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던 것, 이식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이 맞다. 항암제가 잘 안 듣는 경우도 있고, 이식을 하고 싶어도 환자의 상태가 나쁘거나 공여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병의 경우 이식을 치료의 종결로 보기 때문에 외로워도 슬퍼도 그 끝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재발의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어 나를 끝도 없는 나락으로 보내기도 했지만, 끝이 있다는 믿음은 내 마음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식은 끝이 아니었다. 현재 난 전체적인 치료 일정을 마치고 회복 중에 있지만, 아직도 소리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식은 치료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 병은 항암이 아니라 이식 전후로 나뉘는 장기전이다’라는 이식 선배들의 말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는 중이다. 몇십 년 동안 내 몸에서 동고동락하던 모든 피를 깡그리 몰아내고 완전히 새로운 피가 들어와 이곳저곳 정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내 몸이 마냥 멀쩡한 것도 이상한 일일 것이다. 지금 내 몸에선 격렬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퇴원 후 얼마간은, 병원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매일 구역감과 복통에 시달리며 잘 먹지 못했다. 집 안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장실로 가는 그 짧은 사이 정신을 잃고 넘어진 적도 있었다. 정말 신생아가 된 것처럼 하루 종일 자도 계속 깔아졌고 얼굴은 퉁퉁 부었다. 거울을 보는 게 겁이 났다.
그래도 내 옆엔 가족이 있었다. 무균실에 있을 때와는 달리 마음만 먹으면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증상이 심해지는 날이면 오히려 병원이 아니라 불안하기도 했지만 하루빨리 이 증상들을 잘 이겨내 회복하기만 하면 언제든 이 편안하고 따뜻한 공기로 채워진 우리 집에 머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이 기뻤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진 셈이니까… 드디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고 이제 좋아질 일만 남았다는 희망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하루하루는 고통스러웠지만 지나고 보니 또 무탈하게 잘 보낸 것 같은 순간이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건강하게 100일을 잘 살아내면 기쁜 마음으로 백일잔치를 하듯, 나 역시 하루빨리 백일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마음을 졸였다.
이식 후, 백일을 기점으로 조금씩 컨디션이 회복된다는 게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다시 입원할 정도의 큰 이벤트 없이 100일을 맞았다.
하지만 안심할 새도 없이 다시 새로운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이제 다시는 겪지 않아도 될 줄 알았던 일련의 부작용들이 한층 더 강력한 펀치가 되어 날아왔다. 얼굴로 시작된 피부 발진이 온몸을 덮쳤고, 내 몸은 상처 투성이가 되었다. 잠을 자지 못하니 입맛도 없고 수치도 떨어졌다. 동시에 온몸에 있는 점막들이 공격당했다. 그제야 나는 깜짝 놀라 바쁘게 움직였다. 그동안 희망에만 젖어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야 할 일을 등한시했던 것이 생각났다. 더 꼼꼼하게 보습에 신경 쓰고 좌욕과 가글을 했다. 냄새도 맡기 싫어 멀리 했던 고기도 조금씩 먹으려 노력했다.
알고 보면 갑자기 찾아온 이 불청객들은 이식하고 100일이 아니라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언제든 올 수 있는 증상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환자들이 나처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을 감내하고 있다. 그런데도 바보같이.. 항암 할 때도 그랬듯, 왠지 나만은 꼭 비껴갈 것만 같았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이번에도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환자가 되어 가장 괴로운 건 신체적 고통도 있겠지만, 자연스럽게 누리던 일상적인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이제 곧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또다시 혼자 힘으로 일상을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은 나를 참 무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하나의 도전이고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식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는 이제 머지않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젖어 있었다.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과거를 돌아보고 좀 더 단단한 일상을 맞이하고 싶다는 희망과 열정의 발로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 브레이크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좌절했다. 점점 좋아질 거라고만 생각했던 기대가 오히려 나를 더 괴롭게 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계속 달리는 기분.. 마음은 저만치 뛰어가고 싶은데 진창에 발이 빠져 오도 갈 수 없는 기분… 희망이 양날의 검이라는 생각도 한다. 무턱대고 희망적이려고 하기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인간이 될 수는 없는 거냐고 생각한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나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작은 고통은 더 큰 고통으로 뒤덮여 사소한 가시랭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 뭐라도 움직거릴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정신이 신체를 압도하는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극한의 고통을 겪어 본 지금, 내 몸이 내 전부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내 몸을 담는 그릇이 온전치 않으면 그 속에 온전한 정신이 피어날 수 없을 거라는 어쩌면 진부한 생각들.. 내 그릇을 더 단단히 하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아쉽지만 다시 마음에 희망에 불씨를 켜고 나아가보려 한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지만, 끝을 향해 달려가는 중인 것만은 확실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