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병 후 몇 개월간 휴직했던 남편이 드디어 다시 출근했다.
진단을 받고 병원을 오가며 정신없는 사이, 아이들은 할머니 집과 동생 집을 떠돌며 지내야 했다. 가끔 할머니 집에 가서 자는 것을 재미난 이벤트로 여겼던 아이들은, 강제로 짐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제 머리가 커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첫째는 이리저리 옷 가방을 챙겨 학교에 왔다 갔다 하고, 계속 잠자리가 바뀌는 것을 혼란스러워했다. 병원에서 수화기 너머 전해지던 딸아이의 불안은 내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내가 아프지만 않았다면 아이들이 고생할 일도 없었을 텐데… 나 하나로 인해 온 가족이 고생하는 것이 속상했다.
그래서 남편이 휴직 가능하다고 했을 때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가 집에 있으면 아이들도 늘 같은 공간에서 지낼 수 있고 심리적으로도 안정될 터였다. 남편에게 정말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의 항암 치료기간을 보내고 이식을 위해 무균실로 입원했을 때, 나는 도저히 혼자서는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참고 참다 남편을 불렀다. 간병인을 쓸 수도 있었지만 일면식도 없는 남에게 내 바닥을 보여주는 것이 싫었다.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10여 일을 남편과 함께 수감(?) 생활을 했다.
가장 극한의 고통에 시달리던 때였기에 난 침대에 붙박이처럼 누워 꼼짝하지 못했다. 내가 그 좁은 무균실에서 움직일 때는 변기가 필요할 때가 고작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변기까지 가는 것도 힘들어 신랑이 수시로 나를 부축해 줬다.
결혼하고 10여 년이 넘는 동안 난 남편 앞에서 방귀도 뀌지 않으려 애썼다. 그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일도 없었다. 긴 세월 함께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리 현상이 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신랑은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신이 나서 날 놀려대는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코 앞에 있는 신랑 앞에서 모든 생리 현상을 해결했다.(무균실은 두세평 되는 공간에 침대,변기,세면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신기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신랑도 하루에도 몇 십 번씩 구토와 설사로 힘들어하는 나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이사이 내 정신이 조금 돌아올 때마다 희망에 찬 이야기를 했다. 때때로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나를 숨 막히게 했던 비좁고 어두운 무균실은 신랑의 목소리로 살만 한 공간이 되었다. 우리는 몇 달 만에 아주 오랫동안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진단받고 입원해 치료받는 지금까지 나만큼이나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신랑의 심정, 아이들을 돌보며 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들. 그동안 내 몸이 힘들어 미처 챙기지 못했던 신랑의 노고에 고맙다는 말도 많이 했다. 항상 마음에 있었지만 꺼내지 못한 말들이었다.
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신랑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느 날 남편이 해 주는 마사지가 너무 고맙고 시원해서
“오빠는 최고 신랑이야”라고 했더니 어린아이처럼 너무 기뻐했다. 자기가 옆에 있는 동안 그 말을 매일매일 해 달라고 할 정도였다.
나만큼이나 두렵고 힘들었을 남편에게 최고신랑이란 말 한 마디는 그동안 본인의 희생과 힘듦을 인정하고 보상해 주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너무 오글거려 어색했지만, 칭찬도 하다 보면 느는지 오버하며 남편을 최고신랑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동안 육중한 마음의 짐을 짊어진 채 인정과 위로를 갈구했을 남편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내가 고통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남편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식만 끝나면 우리가 다시 할 것들이 참 많았다. 다시 정상인이 되어 함께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나 역시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럴 땐 내 고통도 조금은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10여 일을 보내고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나는 신랑을 다시 아이들 품으로 돌려보냈다. 또다시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웠지만, 아이들이 아빠의 그늘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난 무사히 이식 일정을 마치고 우리가 꿈꾸던 그 미래에 와 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컴컴한 무균실을 생각하면 지금의 일상이 참 기적 같다.
이식실에서 우리가 나눴던 대화처럼 나는 퇴원 후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핑크 빛일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돌아오니 신랑과의 부침이 참 많았다. 내 상태는 병원에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신랑은 신경 쓸 게 더 많아졌다. 감염에 위험한 내가 아이들과 끌어안고 같이 밥을 먹는 것도 신랑 눈엔 한없이 거슬렸을 것이다. 내 딴에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아이들을 그리워했는 줄 알면서도 자꾸 화만 내는 신랑이 서운했다.
이렇게 별 거 아닌 생활 문제로 삐그덕 거리던 우리는 몇 번이나 큰 소리를 내고 서로 말을 잃어갔다. 나는 차라리 신랑이 하루라도 빨리 회사로 복귀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몸은 힘들지 언정 마음이라도 편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제 때가 되어 신랑은 다시 회사에 복귀를 했다. 복귀 날짜가 다가올 즈음, 내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 마음속 앙금은 남아있었지만 짠한 마음이 더 컸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이제 회사에 가서 사람들도 맘껏 만나고 취미 생활도 많이 하고 즐겁게 지내라고 했다.
난 나처럼 남편도 오히려 출근하는 걸 기다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신랑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아이들이랑 함께 한 몇 개월간의 시간이 정말 좋았고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다고 했다. 그는 출근 첫날 돌아와 다시 육아휴직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래도 하루하루 지나가 신랑은 어느 정도 회사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아빠가 없어도 여전히 잘 지내는 두 딸들에 서운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신랑이 다시 회사에 가길 바랐던 나는 한동안 많이 힘들었다. 사실 남편이 해 주는 게 크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오산이었다. 아이와 집안을 챙길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책임감 때문인지 아침잠이 많은 잠만보인데도 흰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한 숨 돌릴라 치면 하교 전 챙겨야 할 것들이 생각나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못해준 것들을 보상해 주고 싶은 엄마 욕심에 더 동동거린 것 같다.
신랑이 다시 출근한 지 보름 만에 난 4킬로가 훅 빠졌다. 이식 부작용의 일종인 거대세포 바이러스도 하늘 모르게 치솟았다. 일주일 만에 만난 주치의 선생님은 깜짝 놀라 나에게 입원을 요청했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이들 사정을 이야기하고 며칠간의 말미를 갖고 약으로 우선 치료 후 입원을 약속했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바이러스 수치가 점진적으로 떨어져 나는 입원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엄마가 다시 입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불안 증세를 보이던 둘째를 보듬어주며 집에서 한가로운 방학을 보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방문을 열며 확인하는 꼬맹이의 모습이 한없이 귀엽다. 어렸을 때 나에게 선물한 “엄마 엉둥이 여기 있다”며 사과 같은 자기 궁둥이를 들이미는 아이의 살결이 꿈결 같다.
아이들 덕분에 나도 더 많이 움직이며 활기를 느낀다. 이제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리도 뚝딱 해내고 내가 먹고 싶었던 것들도 가끔 만들어 먹는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쓰러져 있었던 걸 생각하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언제 어디서 또 부작용이 툭 튀어나올 수도 있고, 어쩌면 또 입원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지만 지금 내 마음만은 참 평화롭다. 아이들 옆에서 많은 걸 해줄 수 있는 엄마여서...가끔은 아이들에게 소리도 빽 지르고 회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신랑도 아직은 살짝 밉지만,
오늘은 큰맘먹고 ‘최고 신랑’이라고 한번 외쳐 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