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돕 Feb 14. 2024

옛 시장에서

고향의 냄새를 맡다

나는 결혼 전까지 한동네에서만 무려 30년을 살았다. 축복인지 불행인지 그 곳에선 이사랄만한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다세대주택의 이층에서 일층으로, 같은 집을 고치고 넓혀서 산 게 다였으니 딱히 이사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은 조금씩 넓어지고 조금씩 좋아지긴 했어도 늘 같은 자리였다. 시골마을도 아니고 도시 한복판이었지만, 나의 어린시절 살던 고향은 정말 시골 내음이 풍기는 듯 했다.


그건 아마 우리집처럼 붙박이로 동네를 지키는 이웃이 많은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느 날 재개발이 확정돼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엄마아빠는 아직도 그 곳에 살고 계셨을지 모른다. 누구네 집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안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동네였고, 가끔 이웃간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지만, 궃은 일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웃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엄마가 애용하는 시장 역시 30년간 그대로였음은 뻔한 일이다.


이번 설엔 엄마와 함께 그 옛시장을 찾았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엄마는 이제 다른 동네에 멀찌감치 터를 잡았고 근처에는 또 다른 재래시장도 있다. 그래도 아주 가끔 옛시장을 찾는 건 다른 시장엔 없는 게 그곳에는 있기 때문이다. 가령, 맷돌에 직접 간 녹두 같은 것 말이다. 엄마는 명절마다 간녹두에 김치, 숙주나물, 돼지고기를 송송 썰어 넣고 녹두전을 부쳤다. 갓 구운 전을 그 자리에서 한 입 베어 물면 별미도 그런 별미가 없았다.


차를 타고 스쳐지나던 길에 봤던 시장은 분명 많이 변해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주 가던 만듯집은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바뀌었다. 양손에 비닐봉지를 쥔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걷던 도로 한켠은 주차장으로 변신해 차가 빼곡했다. 몇 년 전 시장에 불이 난 후, 천막을 교체하고 페인트칠을 새로 해서 그런지 내가 알던 예전의 시장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시장안으로 들어가자 구석구석 낯익은 풍경이 들어왔다. 좁은 통로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가게들이 즐비한 구조는 옛날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나는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그 좁은 통로에서 부지런히 엄마 뒤꽁무니를 쫓으며 시장 구경을 했다.


특히 명절께는 시장순례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밤, 대추, 곶감, 약과, 한과, 떡, 생닭, 고기, 북어포, 조기, 과일 등 참 살 게 많았다. 우리 집은 매년 차례를 지내야 하는 종가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집에 오면 꼭 한두 가지가 빠져 있어 다시 장을 보러 가는 게 다반사였다.


놀랍게도 그 좁은 통로에는 여전히 내가 봤던 떡집, 정육점, 그리고 맷돌에 간 녹두가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책에서나 봤던 맷돌을 처음 보고 눈을 떼지 못했다.


서걱서걱 둔탁하게 돌아가는 맷돌 아래로 되직하고 하얀 녹두가 뚝뚝 흘러내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겨울엔 정육점 난로 앞에 서서 검객처럼 능숙하게 고기를 썰던 아주머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곳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아동복 가게였다. 5천 원이면 부르뎅보다 멋진 원피스를 살 수 있었던 그 옷가게는 항상 내 맘을 두근거리게 했다. 게다가 보고 나오는 길에 먹었던 왕만두는 얼마나 맛있었던지.. 엄마는 가끔 동네아주머니와 함께 길에서 파는 냉커피도 마셨다. 기다란 종이컵에 담긴 얼음 동동 커피는 단내가 코를 찔렀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몇십 년 전 기억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러던 중 나를 가장 놀라게 한건 몇십 년 전과 변함없는 야채가게 아주머니의 얼굴이었다.


녹두를 사고 돌아가던 엄마는 싱싱한 열무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주인아주머니는 아직 열무가 비싸다고 선뜻 권하질 못했다. 한데 그 목소리가 너무 익숙해 얼굴을 보니 마치 어릴적 함께 살던 동네 할머니를 만난 듯 낯이 익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정말 옛날 그대로셨다. 아주머니를 변치 않게 만든 건 시장이 주는 활기였을까? 몇십 년간 이어온 생의 열정이었을까?


아주머니는 날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초등학교 때부터 봐온 얼굴이기 때문이다. 너무 반갑고 신기해 알은체를 하니 아주머니도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그리고 엄마에게 낮게 말씀하신다.

열무 담그려면 가져가. 9천 원에 가져왔는데 9천 원에 줄게.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생각하다가 웃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 속 변하지 않는 것들은 소중하다. 그리고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대신 누군가의 자식인양 소중히 다뤄지는 시장의 물건들은 내게 추억과 온기를 불러일으킨다. 한참 잊고 지내던 과거의 나를 만나게 함은 거부할 수 없는 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3천 원의 행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