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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돕 Feb 11. 2024

3천 원의 행복

미용실에 갔다

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미용실에 다녀왔다. 이식을 위해 머리를 빡빡 민지 근 1년 만이었다.


1년 동안 내 머리는 생각보다 많이 자라지 않았다. 이제 겨우 까까머리를 지나 숏 컷에 이른 정도다. 영양소 흡수가 느려서인지, 나이를 먹어서인지 머리도 참 더디 자란다. 그래서 아직 외출할 때는 물론이고 집에서도 가끔 모자를 쓰고 지낸다.


외출할 일이 잦지는 않지만 좀 더 격식 있는 자리라면 가발 위에 모자를 덧댄다. 이식이 결정되자마자 남편이 선물해 준 가발은 1년간 내 필수품이었다. 가끔 남편은 내게 필요한 걸 나보다 더 빨리 캐치하는 선구안이 있다. 쪼그라진 내 외모에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어디든 외출가능하게 하는 고마운 녀석.


하지만 이제 목 뒤 꽁지머리가 많이 자라 가발에 모자를 쓰면 내 머리가 삐죽 튀어나온다. 밝은 갈색의 가발과는 달리 검정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오랜만에 나서려니 미용실을 가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아직 집이 아닌 곳에선 모자를 벗은 적이 없어서다.


서비스업의 성지답게 미용실 직원은 매우 친절하고 다정했다. 겉옷과 모자를 벗어 달라는 주문에 머리가 너무 짧아서...라고 말끝을 흐리니 다른 손님이 볼 수 없는 뒤쪽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꼭 내 머리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다 아는 사람 같았다. 누구 말대로 암환자 수두룩 빽빽 시대라 그런 것일까?


오묘한 갈색을 내며 찰랑이던 긴 머리를 가진 앳된 미용사는 내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주었다. 나는 담당의를 만난 듯 내 머리카락의 불성실함을 소상히 고발했다.


머리가 어찌 이리 제멋대로 자랄 수 있는지, 앞머리는 왜 이리 더디 자라고 뒷머리는 왜 이리 빨리 자라는지, 옆머리는 왜 반항아처럼 한쪽으로만 삐쳐 올라가는지.. 그녀는 전문가답게 조언했다.


“머리카락이 너무 얇고 힘이 없어서 그래요. 숱도 많지 않고요. 그리고 이렇게 계속 모자를 쓰면 머리가 숨을 못 쉬어서 더 못 자라요.”


앞머리가 더디 자라는 이유에 모자도 포함이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해법도 제시해 줬다.


“모자를 쓰셔야 하면 이런 야구모자 말고, 차라리 구멍 송송 뚫린 여름모자나 헐렁한 벙거지를 쓰세요. 두피가 숨을 쉬면 머리도 더 빨리 자랄 거예요.”


난 그녀의 말에 수긍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내 변신을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커트는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앞머리는 길러야 해서 자를 게 없고, 옆머리도 한번 다듬으면 기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자르기가 아깝단다.  그래서 꽁지머리만 살짝 다듬는 게 최선이란다. 나 역시도 1년간 고이 기른 머리 함부로 자를 수 없어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거울을 보니 내 머리는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문가의 손을 거치면 삐침 머리도 정갈해질 것이라는 내 예상은 빗나갔다. 우리 집 식구 중 그 누구도 내가 머리 자른 걸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나 역시 뒤통수를 손으로 만져보지 않으면 알 길이 없었다. 역시 모자를 벗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미친 물가에도 내 미용 비용은 고작 3천 원 밖에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양심 있고 센스 있던 그 미용사는 내 머리는 자를 데가 별로 없어서 앞머리 커트 비용만 받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비록 머리스타일은 별차이 없어도 미용실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늘 나는 3천 원에 행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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