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히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릴 때 내가 느낀 선생님은 엄청난 권력자이고 능력자였다. 선생님은 직업인이기 이전에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시기였고 엄마 아빠가 선생님인 친구들을 보면 부럽고 대단해 보였다. 학창 시절 대부분의 선생님이 훌륭한 편에 속했다는 것도 내 긍정적인 인식에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연한 생각이었기에 어떤 노력이나 계획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내가 직장을 선택해야 할 시점에는 많이 어리기도 했고 선생님보다 훨씬 더 있어 보이는 존재를 꿈꾸는 일명 꿈만 큰 이상주의자였기에 헛것을 찾아 휴학도 하고 많이 헤맸다.
그저 그런 직장 생활 후 내가 다시 선생님에 대해 생각한 건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고 나서였다. 터울이 큰 두 아이의 육아와 남편의 해외 파견으로 나의 ‘일’에 대해서는 꿈도 못 꾸다 내게도 나만의 시간이란 게 주어지자 생산적인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내 힘으로 화폐를 벌어 가족들 앞에 떵떵거리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여차저차 영어 선생님이 될 기회를 얻긴 했지만 이틀 동안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 포기했다. 주변에서 모두 말리는 분위기였다. 아직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한 아이들을 방치한 채 얻을 수 있는 게 뭐 그리 대단하겠니 하는 이론이었다. 분명 일리가 있었다. 그즈음에는 엄청난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지만 금방 잊었다. 사실은 나도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을 여기저기 맡겨 놓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일하러 가야 하는 내 모습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엄마로만 살았는데 직업인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컸다. 게다가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매일매일 지켜보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상이었으니까.
그런데 투병 후 이제 조금 살만해 지자 나는 다시 선생님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할 만한 일이 그런 것밖에는 딱히 없기도 하고, 어쩌면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하려는 선생님은 그냥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몇 달간 꼬박 수업을 듣고 시험을 통과한 후 자격을 부여받을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같이 할 아이들을 내 힘으로 모아야 한다. 그래서 주저하게 된다.
아프고 나서 할까 말까 고민되는 것들은 그냥 하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나에게는 얼마간의 시간이 남아있는지 더욱 알 수 없고, 지금까지도 고민하느라 놓친 것들 투성이니까. 고민하는 시간을 아껴 차라리 실패하더라도 실행하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런 옵션이 눈앞에 닥치니 주저주저한다. 여러 가지 상황의 수를 고려하며 정말 해도 될지 재게 된다. 이런 내 모습이 답답하기도 하고 아님 신중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오락가락이다. 어쨌든 내 컨디션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하는 일이니 일단 체력을 키우고 있다. 무리하다 아프면 끝장이니까. 나는 뭐라도 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을 갖출 수 있을까? 건강한 상태로 하나하나 이뤄가며 정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뭐라도 나올까 싶어 주저리주저리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