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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Sep 07. 2023

위기의 헤아림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를 인지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여러분과 같은 '사람'을 떠올리지 말고, 욕구와 믿음 등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행동 능력과 지각 능력 사이에 개념적인 인간관계가 있는지, 그래서 지각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생명체는 행동 능력을 가질 수 없는지, 아니면 가질 수 있는지만 집중해야 한다.' 이 글은 셀리 케이건이 동물에게도 도덕적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하는 명제를 풀어가기 위해 철학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도출한 중간쯤의 결론이다. 내가 이를 중간쯤의 결론이라 말하는 것은 도덕적 입장을 취하는 문제가 과연 동물에 대한 존재론적인 입장을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 아직까지는 완벽한 답변으로 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쯤에서도 짐작은 한다. 인간이 사회를 영위하고 있는 질서란 차별적 관계로 형성되어 있으며, 몇몇 기득권과 자본의 권력은 이를 더욱 곤고히 하려는 노력을 지금도 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의 차등적 관계는 자신의 위치가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 어떤 제약이 있는가를 직간접적으로 체감하는데 이것이 생을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면 사회적 문제로 이슈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그 존재함이 위협당하거나 평가절하 되는 점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데, 이런 움직임이 바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움직임으로 발현시킬 수 있다는 점은 때로 인간을 위기의 존재로 내몰기도 하는데, 나는 그런 마음에 대한 경계를 할 수 있는 존재도 인간이라 믿기에 절망 가운데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권리를 말할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동물은 그저 존재함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 존재에 대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점을 생각한다. 다른 이들과의 비교도 가능하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변하지 않는 똑같은 원리로 세상에 태어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육신으로 살아가다 보면 인간은 어느 시점에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질서에 조금씩 의문을 갖게 된다. 말 그대로 태어난 행위의 모습은 모두가 동일하나, 태어나고 살아가는 방법에서 우리가 차등적 삶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달라지기만 한다면 존재로 평등한 세상은 가능한 일이 아닐까를 생각한다. 세계의 역사로 본다면 백인에게 억압당한 흑인의 역사가 그랬을 것이고, 우리의 역사로 본다면 가문과 출신의 이름으로 사람의 존재를 구분 지었던 조선과 그 이전의 역사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존재의 규명에 대해 투쟁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권리를 피로 증명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반복된 비극으로 오늘날 조금이나마 존재로 평등한 인간 사회를 만들었다. 이토록 잔인한 세계의 역사를 딛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는 그 존재로 인정받는 세상을 갈망하는데, 이 사실은 지구의 역사보다 짧은 인간의 역사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복잡한 인간사의 이야기는 언제나 자연의 섭리와 동떨어져 있다. 있는 그대로 태어나고 죽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산의 모습과 다르게 인간은 본연의 모습을 역행하려 한다. 인간의 욕망이라 부르는 이 모든 것들은 자연과 함께 살기를 거스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슬프고 어리석은 역사를 또다시 짊어져야 한다는 인식을 망각한 채 그 욕망을 계속해서 실현한다.


한때 나는 기술의 발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계속해서 혁신하고 혁명하는 인간의 지적인 능력에 대해 그야말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지금 내가 컴퓨터로 나의 생각을 입력하는 모든 과정이 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한 놀라운 결과물들이라면 이 모든 것을 이룩한 인간의 지성과 역사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편리하고 쉬운 방법으로의 발전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를 발전시키고 보이지 않는 영역을 구체화시키며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생각에, 이 움직임에, 끝이 있을까? 나는 언젠가부터 이 모든 것에 대해 제자리걸음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계절이 반복되는 것처럼, 태양이 같은 자리를  뜨고 지고를 반복하는 것처럼 조금 더 무엇이 되지 않아도 같은 일들을 반복하거나 지금처럼 과 같은 세상이어도 괜찮다는 생각과 마음이 인간의 생각에 남겨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처음 사용했던 휴대전화는 '아이폰3G'였다. 당시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한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던 스마트폰이었는데, 비싼 가격은 물론이고 유려한 디자인에 다양한 기능까지. 사람들은 모두 아이폰에 열광했다. 기술의 혁명이라 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폰은 더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했고, 스티브잡스가 떠난 이후에도 그 변화는 멈추지 않고 있다. 나의 스마트폰으로 어떤 작업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작은 오류가 나는 것 같으면 휴대전화를 바꿀 때가 됐나, 싶어서 새로운 휴대전화를 검색해 본다. 벌써 열몇 번째에 대한 아이폰 정보가 공개되어 있다. 나는 진정으로 궁금하다. 나의 첫 휴대전화 '아이폰 3G'에 대해 나는 정말 완벽한 적응을 끝낸 후 지금의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나아가는 사회에 대해 박수를 보낸다. 인간의 위대함을 이렇게 증명하고 있는 거다. 비행기로 지구 어디든 갈 수 있고, 가상현실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본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한 존재의 규명 없이 오직 관계로 형성된 '나'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서 그 관계가 흔들리기라도 하면 위로와 공감을 찾느라 급급하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란 무언가 위대함으로 표현하지만 위태로워 보인다. 그것은 인간의 위대함이라 불리는 모든 영역에서 가려진 헤아림의 영역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피라미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가장 밑에 있는 반석이 튼튼해야 한다.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진 그다음의 위층은 또 그 위에 쌓일 또 다른 존재를 위해 나름의 단단함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 가장 위 층에 존재하는 한 조각은 아래의 모든 조각들이 서로를 지탱하는 단단함으로 존재하기 위해 가장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살펴야 한다. 누군가의 보호와 또 누군가의 보호로 우리는 서로가 안전해진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그 밑을 살피고 있는가. 우리 안에서도 또 다른 피라미드를 만들어 안전한 기둥을 세우지 않고 서로가 높아지려고만 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습득하기 전에 이전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었던 스마트폰의 기능들을 안전하고, 완벽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를 쓰다가 신발끈이 풀려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뛰기를 반복해 넘어질 날이 곧 올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고 싶다.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권리를 규명하기 위해 인간은 목소리를 높인다. 때로는 인간이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 의식주를 포기하면서까지 그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권리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영위와도 같은 것임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왔던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고 완벽하게 다다간 후에 나아가도 늦지 않겠다는 이야기와 같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보다 연약하다고 느끼는 모든 생명에 대해,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지구가 거저 준 생명과 존재들에 대해 조금 더 천천히 돌아보거나 그들의 질서를 완벽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된 후에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도 늦지 않다는 의미와 같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조금 더 나아가는 세상은 우리가 나아가지 않을 때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고 지구의 그 어떤 존재들보다 유능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중이라면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한 탐구를 선행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존재를 헤아리지 않는다면 미래는 위기일 수밖에 없다.                     



안녕하세요, 임작갑니다.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는 동물권과 생명존중에 대한 생각을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분들과 함께하고자 연재하게 된 코너-ㅂ니다.

이번 연재를 '동물에세이, '라는 카테고리로 묶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주로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만

결국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몇몇의 동물 애호가들 또는 환경 운동가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사람이 사는 이야기,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눠야 할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이번 연재에서는 동물권에 관한 좋은 책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모쪼록 이번 연재를 통해 여러분의 삶이 조금 더 편안해 지길, 

일상에 쓸모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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