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주혜 Sep 12. 2023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개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그도 이상형이 있다. 나이가 들어도 참으로 한결같아서 그는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의 이상형은 이렇다. 자신보다 조금 키는 커야 하고 머릿결은 곱슬에 백발이면 더 좋다. 자신과 같이 귀여운 눈망울을 가졌는데 그 눈빛으로 꼬리를 살랑살랑거려 주면 그는 그녀에게 백 프로 플러팅을 시도한다. 누구의 이상형이냐고? 백고동. 이제 중년의 중후한 귀여움이 물씬 풍기는 우리 집 반려견이다. 이렇게 혈기 왕성한 고동이에게는 사실 말하지 못한 슬픔이 있다. 내가 유기견이었던 고동이를 입양했을 당시에는 중성화수술을 의무화했다. 역시나 고동이의 보호소였던 그곳도 입양 조건에 중성화 수술이 있었다. 당시 나는 고동이를 입양하기로 결심하면서 중성화 수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그것이 옳은 방법인가에 대한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 고동이는 우리 집에 오기로 확정되면서 바로 중성화 수술을 받았다. 당시 고동이의 중성화 수술을 집도하셨던 수의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동이는 세 살이 넘어, 즉 성견이 된 상태에서 중성화를 했기 때문에 여전히 관심이 있는 강아지에게 호감을 표현할 수는 있다고 했다. 성적 기능은 하지 못하지만 생각과 기억으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당시에는 수의사의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쉽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마음에 드는 강아지를 보면 인사를 하고 싶고, 친해지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우리 고동이가 나는 어쩐지 조금 짠하고 미안하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동이는 고동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운명을 나에게 맡긴 셈이다. 나는 그 사실을 가끔 떠올리거나 내가 한 생명에게 그런 존재라는 게 부담스럽기도 한데, 살다 보면 뭐든 별일 아닌 것처럼 되는 마음 때문에 고동이와 나는 그저 그런 일상을 보낸다. 나는 가끔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고동이에게 미안하면서도 그런 존재로 태어난 고동이를 신기하게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존재, 어떤 인식이나 의지, 조건과 다양한 정도에 치우치지 않고, 그저 사랑하는 마음만 있는 존재. 고동이가 그렇게 태어났기에 나를 오늘도 어김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그 생명이 견디고 있는 현실에 경외감마저 느낀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 고동이와 함께 서로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동물을 키우며 생명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하고 교감하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마음이다. 즉, 제 아무리 날고기는 유명한 철학자나 몇 권의 저서를 낸 똑똑한 지성인들이 동물에 대해 설명을 한다 해도 고동이는 내가 제일 잘 알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가끔 나는 이런 마음을 남편에게 이야기하며 고동이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남편은 이걸 또 줄여 말한다. 그래, 고부심.


언젠가 고동이의 계정을 만들어달라는 사람이 있었다. 고동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렇다고 했다. 귀여운 것을 보며 더러운 세상을 마주하지 않고 힐링하고 싶다고 했다. 이기심으로 가득한 사람이 아닌 그저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희생의 아이콘들을 보며 위로를 얻는다는 사람들. 그들은 세상에는 내 마음 하나 알아주는 곳 없고,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만 해서 언제나 전쟁과 같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피할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상처받은 마음이 피해야 할 곳, 더럽힌 나의 안전함을 다시 재정비해야 할 곳. 그곳을 찾아 헤맨 사람들은 결국에 갈 곳이 없으면 누군가를 비난하며 앞장 서거나, 모든 이들을 뒤로하며 가장 소외된 곳에 있기를 택하는데, 이런 방법도 영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귀여운 것을 찾거나 나만 바라봐 줄 생명을 곁에 두며 살아가기를 택한다. 고동이의 계정이 있다면 팔로우를 하겠다고 말했던 그 사람이 이어서 말했다. '고동이는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아닙니까, 그럼 우리는 랜선으로라도 만나야겠어요. 그 호사를 당신만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비슷한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면 귀여움으로 힐링하기는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의 헛헛함과 공허함, 그 어떤 욕망으로도 채울 수 없는 새로운 목적과 목표들,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끝없는 경쟁. 사회가 요구하는 우리의 모습들.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정답은 어디에 있을까. 만약 있다면 인간으로 살아가며 알아차릴 수 있을까. 아직 서른 중반에 머물고 있는 나의 판단으로는 일흔쯤 가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일흔의 어르신들과 대화를 해보면 문득 이런 마음이 든다. 그들은 이제 겨우 깨달았을 뿐이고, 겨우 견디다가 다음 생이 있을 거란 굳은 믿음으로 또 그저 살아가는 중이라는 것. 그래 그것이 우리 생이 아니던가.


결과적으로 고동이의 계정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고동이가 좋아요를 누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도 고동이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고동이의 미용 전후 사진을 피드에 올리곤 하는데, 때로는 고동이가 미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가 귀가 축 늘어지는 경우를 본다. 나는 그 모습마저도 너무 귀여워서 동영상을 찍기도 하는데, 심지어 그 영상을 올리기라도 하면 렌선 이모, 삼촌들은 좋아하지만 고동이에게는 영 보여주지를 못하겠다. 고동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고동이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렇다. 고동이 덕분에 나도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의 인스타피드를 보게 될 때가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요즘은 알아서 나의 취향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야말로 남의 개들의 속사정들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피드를 보다가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고동이를 괜히 한 번 본다. 랜선으로 만날 수도 있었을 우리가 가족이 되었다니, 인연이 신기하다. 이 녀석은 어디에서 태어나 여기에 있을까.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여전히 고동이는 말이 없다. 그저 오늘 나를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난 고동이는 누군가의 울고 웃는 사연이 절절히 들려와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내 옆에서 잠을 잘 뿐이다.


트위터에서 스레드까지. 끊임없이 올라오는 누군가의 모습이 나는 정말 좋은가. 엄지를 척 올리며 강한 긍정을 보낼 정도로 가까일지도 모르는 타인의 삶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가. 그들의 삶이 나를 나로 세우는 데 좋은 영향력을 주는가. 나를 온전히 사랑해 주는 존재들의 눈빛을 나도 모르게 외면하면서 어쩌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들의 자랑과 유희에 나의 것들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좋아요를 누르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좋은 이야기들은 얼마나 될까. 이런 회의적인 생각을 하다가 난데없이 이상한 노선으로 생각을 달리한다. 이를테면 나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그녀를 생각하는 일이다. 그녀는 내가 못생기게 나온 사진에는 어김없이 좋아요를 누르는데 그 점이 영 불편하다. 그녀의 좋아요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쓸데없는 파악을 하는 나의 상태는 역시나 불만족스럽다. 이것이 다 좋아요 때문인데, 현명하게도 고동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일 따위는 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내내 주고 있다. 사랑하는 것만을 사랑하기. 우리가 귀엽다고 말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아주 시니컬하고 지적이고 완벽한 삶의 방법을 배운다.



안녕하세요, 임작갑니다.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는 동물권과 생명존중에 대한 생각을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분들과 함께하고자 연재하게 된 코너-ㅂ니다.

이번 연재를 '동물에세이, '라는 카테고리로 묶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주로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만

결국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몇몇의 동물 애호가들 또는 환경 운동가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사람이 사는 이야기,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눠야 할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이번 연재에서는 동물권에 관한 좋은 책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모쪼록 이번 연재를 통해 여러분의 삶이 조금 더 편안해 지길, 

일상에 쓸모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위기의 헤아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