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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Sep 14. 2023

승부에 대하여

[여행] 떠나는 순간에 남아 있는 것

작은 언덕만 올라가면 아빠는 손을 잡아준다고 했다. 이 언덕만 올라가면 곧 목적지에 도착할 거라는 믿음으로 나는 또 한 계단을 오른다. 가파른 숨을 천천히 고르며 다시 한번 날숨과 들숨을 반복한다. 그렇게 또 한 계단. 드디어 그 작은 언덕을 다 올랐다. 그러나 봉우리는 여전히 멀리 있다. 목적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달렸는데 아직이라고? 아빠의 속임수도 이젠 속지 않는다. 내 힘으로 가거나, 또는 가지 않거나. 내가 결정해야 할 문제다. 일단 가기로 마음먹고 또 한 계단을 오르는 순간 나는 생각한다. 저기 저 높은 곳에 도착하면 그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정말 하늘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까? 그렇다고 저 하늘을 주머니에 놓고 올 수도 없을 텐데, 이 계단을 오르는 건 정말 나에게 필요한 일인가. 아, 일단 나는 다 모르겠고 지금 너무 힘들다. 더 이상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겠다. 그렇게 못하겠다는 생각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다. 아빠가 말했던 작은 언덕은 돌아보니 꽤 큰 언덕이었고, 아빠의 속임수가 없었다면 나는 넘어오지 못했으리라. 나는 그렇게 아빠와의 등산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승부란 이런 것.


승부는 다른 이들과 견주는 것이 아니었다. 작은 봉우리도 아니었다. 나의 인생에는 오직 나와의 승부만 있을 뿐이다. 언젠가 자존심을 건드렸던 타인에 대하여 화가 났던 문제들이 있을 때도 이를 벗어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내 마음에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또래 집단에서 느꼈던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을 때에도 선생님과 친구들은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에 대해 누군가 조언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결국에 내 앞에 놓인 작은 언덕을 오르는 건 나의 힘으로 한 일었다. 나는 조금씩 삶에서 마주한 작은 언덕을 넘고 또 넘어, 지금의 언덕 앞에 서 있다. 오늘날의 나의 언덕이 얼마나 높고 험난할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와의 승부수를 던진 상태다. 혼자만의 힘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는 말들은 이기적인 마음과는 별개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이제부터 당신은 혼자 그 길을 가지 말고 함께하자는 위로를 여유롭게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언덕이라 부르는 수많은 모양의 삶의 아픔을 이해하며 건네는 위로와 같다.


한때 바다를 향해 앉을 수 있는 책상을 갖고 싶은 적이 있다. 바다를 보며 낭만을 뽐내면서 글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다. 바다의 깊은 곳이 보이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저 먼 곳까지 오래도록 살펴서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도심에 살아서 바다를 보는 책상을 갖지 못했지만 바다의 심연과 같은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책상을 갖게 됐다. 아침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저마다의 바쁜 사연들, 울고 웃는 대화들, 언젠가는 갑자기 우리 곁을 사라지는 사람들까지. 사람들은 각자의 언덕을 넘으며 자신만의 심연을 갖고 있고 내 주변의 한 사람의 인생에만 귀를 기울여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야기, 그래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좋은 작가가 되는 방법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유명해지는 것이 더욱 쉬울 것도 같다. 나는 당신의 심연을 정말이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진정한 작가인가. 그래서 나는 이 승부를 계속해도 될까.


아빠는 나와 함께 산을 오를 때마다 말했다. 나의 발걸음이 지금도 너무 빠르다고 말이다. 천천히 올라가야 한다. 나의 발걸음을 느끼면서 가다 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더욱 명확히 보인다. 없던 길이 생겨나는 기적도 경험한다. 그래서 나는 내 삶에 펼쳐진 작은 언덕이란 승부를 조금씩 오르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발걸음을 보면서 말이다. 당신의 일렁이는 심연을 어떻게 하면 더욱더 자세하고 친절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당신의 삶을 잠시 글로 옮겨도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다가간다. 알 수 없었던 당신의 마음이 보인다. 그렇게 작은 언덕을 또 넘는다.


오늘 나는 목포의 항구에 와 있다. 저 멀리 파도가 일렁이지만 땅에 서 있는 나는 파도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내가 만약 가 닿아야 할 파도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소리 없는 저 먼 곳의 파도라면, 나는 얼마나 더 오래 헤엄쳐야 할까. 당신의 고유한 속속들이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나는 얼마나 더 오래 당신 곁에 머물러 우리 삶 속에 펼쳐진 작은 언덕들을 넘어야 할까. 알 수 없고 끝이 없어 재미있지만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나의 승부는 바다에 있고 저 먼 곳에 있는 당신의 마음들에 있다. 그리고 그전에 내가 만든 나의 세상에 있다. 나는 그래서 바다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의 날들을 사랑하기로 한다.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그 세상이 그렇게 존재했으면 좋겠다. 서로에게 승부의 검을 겨누지 말자. 나와의 승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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