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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Sep 18. 2023

옆자리에서 움직이는 것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플라톤은 자연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한 후에 언제나 결론은 자연 안에 두지 않고 이데아를 언급했다. 자연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친 후에도 결과적으로 우리가 원하고 상상하는 자연은 이데아에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론은 후대에 수많은 철학자들의 생각에 겹쳐 어떤 시대에는 힘을 잃거나 또 어떤 시대에는 가장 의미가 있는 이론이 되기도 했다. 인간사 또는 자연의 섭리를 설명할 때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영역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언제나 '답정너' 같은 결론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결론을 내지 못한 결론'일 수도 있는데 이 '결론 없음'으로 인해 우리는 삶의 위로를 얻고 때론 무언가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숙제에 대하여 잠잠한 답을 얻은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한다.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종교는 언제나 이데아를 언급한다. 지금 내가 이데아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우리의 삶에 대한 고통이 끊어지는 날이 바로 그 이데아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볼 뿐이다. 기대란, 희망과 비슷해서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 된다. 가장 최근에 했던 나의 기대를 떠올리자면 그 모양이 참 볼품이 없거나 아주 작은 기대라고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들 뿐인데, 그 작은 기대들이 우리를 살게 한다. 이 사실이 놀라운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작은 기대에 대한 맛을 보았기 때문에 보다 더 달콤하거나 보다 더 큰 기대와 희망. 이런 것들이 이 땅에 없을지라도 어디엔가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들이 우리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지 않을까. 플라톤의 이데아가 아직도 수많은 철학자들과 희망을 품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지 않을까. 삶의 원동력. 삶에 대한 기대. 그 어디엔가 있을 우리의 아름다운 종착지.


'기대'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만났을 당시에는 내가 태어나 처음 사랑이라는 단어를 고민했던 시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 와 줬으면 하는 기대, 언젠가 이 사람과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그곳. 함께 먹고 싶은 음식. 나는 사랑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기 전에 좋아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기대했던 것 같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미래의 모든 일까지. 생각으로만 품었던 그 기대들이 점차 실현되는 날엔 사랑이라는 단어가 조금씩 구체적으로 변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모양에 대해 나름대로 그리기 시작했다. 기대는 사랑으로 변했고,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 옆에 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결정된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인연이라는 끈으로 연결된 우리는 서로가 옆에 있는 사실을 인지하며 새로운 기대를 함께 만들어갔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모양이라고 믿는 믿음으로. 어쩌면 우리에게는 우리도 모르게 생각했던 우리 안에 이데아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서로를 통해 만들어진 이데아. 이 세상에 그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이데아가 작고 큰 인생의 순간들에 펼쳐져 있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형성된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살아있음을 전제로 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움직이는 것일까. 생각하는 것일까. 자연이 만들어놓은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것일까.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논의를 하자면 지면이 너무 부족할 듯하고, 이것은 어떨까. 나만의 살아있음에 대한 생각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로 이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살아있음에 대해 생각할 때 언제나 동물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자연과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기 쉬운 동물이다. 인간의 생활권은 자연과 동떨어진 공간에서도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아침에 일어나 우리가 바라보는 건 하늘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화면의 메일 창일 수 있는데 그렇게 자연과 동떨어진 감각으로 살아가면 언젠가 자연을 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지붕은 언제나 하늘이며, 우리가 딛고 서 있는 곳은 땅이다. 우리는 지구 안에 있을 뿐, 그 어디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곁에 숨 쉬는 동물들이, 더 가까이에는 우리의 반려동물들이 인간이 자연 안에 있을 때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인간사는 갈등의 연속인데, 어느 날 그 갈등이 정말 고조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말들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말은 또 다른 말을 낳고 그 말들은 알 수 없는 괴물의 형태로 남는다. 이상하게도 그 말은 사람의 머릿속에 온종일 맴돌아 영혼을 갉아먹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그 말이 물리적인 힘을 가질 땐 목숨을 잃게도 하는 무서운 일들이 생긴다. 나 역시 누군가의 말로 인해 상처를 받을 때도 있고 나의 마음과 별개로 말들이 오해를 만들어 낼 때도 있는데 그런 갈등상황에 내가 잠잠히 바라보는 것은 우리 집 강아지의 눈빛이다.


나와 함께하는 동물은 말을 하지 않는다. 표정과 행동, 몸짓으로 기분을 표현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의 스펙트럼도 다양하지 않다. '좋은데 슬프다, 또는 마음이 조금 쓰리지만 괜찮다.' 이런 복잡한 감정 따위는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좋고 싫고, 무섭고 편안하다는 것이 전부다. 이렇게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들은 말이 아닌 존재자체로 표현되는데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지점에서는 인간인 내가 이토록 복잡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들 만으로도 지구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소통이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말을 하는 존재를 넘어 느끼는 존재라는 점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꽃이 꺾이면 시들고, 동물이 버려지면 삶의 의욕을 잃는다. 생명은 지구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생김새가 다르지만 생명으로 하나라는 점을, 그리고 그 하나 된 존재들은  분명 살아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이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진정으로 각성할 수 있는 본질적인 지점은 우리 옆에 있는 존재들이 생명임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공동체적인 인식. 사실은 모두가 하나의 연결고리 안에 있으며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 이상의 필요함으로 존재한다는 확신.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을 하지 않는 생명에 대해 생명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이곳은 지구. 신이든 과학이든, 그 어떤 것이 만들어낸 세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를 벗어날 수 없는 하나 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신기하다.' 어떤 대중음악 가사가 그렇듯 나도 그렇다. 움직이는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해 낼 수 있겠는가. 움직이는 법에 대해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움직이기 시작한 그날부터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데아를 생각해 내는 대단한 생명체가 되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움직이는 오늘에 대해 글을 쓴다면 어떤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신기하다는 단어를 반복할 뿐이지 않을까. 신기한 지구. 움직이는 서로를 보며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독보적인 것은 없으며 모두가 생명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이해한다. 인간인 우리가 할 일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서로의 움직임을 존중하고 때론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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