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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Sep 19. 2023

나와 닮은 생명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닮는다. 현재 내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 나의 표정이 나오고 고유한 모양이 생긴다. 언젠가 제주로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던 우리는 어떤 해녀 한 분을 만났다. 그녀는 직접 물질을 해 온 해산물들을 펼쳐놓고 관광객 또는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라면을 팔고 있었다. 번듯한 식당을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지만 물질을 하는 것만으로는 그 꿈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던 그녀다. 조금 이른 아침이지만 우리는 그녀가 끓여주는 라면을 먹기로 했다. 지붕이라면 지붕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 같은 허술한 천막 아래, 바위틈 사이로 지지대를 고정해 놓은 플라스틱 식탁 앞에 우리는 앉았다. 제주 바람은 가을바람처럼  불고 있었고, 바로 옆에 있는 바다는 라면이 인스턴트 음식이라는 것을 잊게 할 작정이었는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자연이 주는 최고의 만찬을 경험하게 해 주겠다는 누군가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 그 라면은 우리가 아는 라면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맛있다'라는 단어로는 모자란 처음 먹어보는 라면의 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배가 부르니 그제야 우리에게 라면을 끓여준 그녀가 보였다. 제주 바다를 직장으로 삼고 산 세월만큼 그녀의 좁은 어깨는 어딘가 깊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삶이 궁금했다. '아주머니 이 일을 언제부터 시작하신 거예요?' 그녀는 대답했다. 여기 온 사람들이 가끔 그런 걸 물어보기도 하는데, 라면을 끓이는 일은 정말 먹고 살 정도일 뿐. 라면을 끓이는 일은 '물질'을 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물질 뿐이라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고. 그녀의 인생에 시작과 과정, 그리고 미래의 모습은 모두 바다와 함께하는 일들 뿐이었다.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일은 언제나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일이다. 숨을 쉬기 위해 육지로 걸어 나오면 다시 호흡이 정돈된다. 숨이 일정해지면 바다로 들어가 다시 숨이 차 오를 때까지 헤엄을 쳤던 그 순간을 반복한다. 그녀가 가장 잘하는 일. 그래서 멈추지 않는 일. 거의 매일 바다에 온몸을 맡기는 그녀는 바다와 닮았다고 표현하나, 거의 바다와 다를 게 없었다.


바다를 사랑한 그녀를 보며 나는 무엇을 닮아 있을까, 생각했다. 내가 현재 닮은 것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으나 내가 닮고 싶은 것들은 너무 많았다. 어느 시인이 남긴 아름다운 산문의 한 줄을 읽노라면 나는 그 한 문장을 닮고 싶고,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멋진 주인공의 현실적인 대사를 들을 때면 그 영화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몇십 년, 때론 몇백 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고전의 명작을 읽을 때면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는데, 마치 그것은 내가 그때로 돌아간 것 같거나 또는 그때가 오늘날의 현실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그 경험을 시간여행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고전을 읽는 나의 순간을 다른 단어로 표현해 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진하게 느끼다가 독서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나는 내 삶에서 어떤 것을 닮아 있느냐, 하는 것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면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고 그저 닮고 싶은 것들을 나열하는데, 그렇게 나열하다 보면 문득 내 삶이 온통 내가 닮고 싶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나의 삶으로 조금씩 채워진다. 자기개발서와 같은 책들은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는 삶'이라는 문장으로 끊임없이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에 대해 되새김질을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라면 노력하는 되새김질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 삶에 놓아두었을 뿐인데 어느새 희망하고 있었던 삶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나의 간절함이 내 모습을 완성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다가 되어야겠다고 단 한 번도 마음먹지 않았지만 그저 매일 바다로 들어갔던 삶 덕분에 바다가 된 그녀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동물을 생각할 때 우리는 동물이 인간에게 얼마나 학대를 받고 있느냐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려고 하는 잘못된 의식에서 시작된 비극이기에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그런 움직임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반복되면 동물을 단순히 '불쌍한 존재'로 바라보게 되고, 우리의 할 일은 불쌍한 동물들을 구해줘야 하는 의무감을 들게 한다. 현실적으로 그 의무감이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시점인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동물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우리 사회의 법 정의만 해도 그렇다. 생명이 아닌 물건으로 보는 이 관점은 오히려 동물에 대한 대중에 대한 생각을 양극단으로 놓이게 한다. 대중들의 감수성을 반영한 법의 내용이 아니라 동물에 대하여, 나아가 생명에 대한 철학적이고 실제적인 논의를 거쳐 분명히 법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동물을 물건이 아닌 생명, 즉 김금희 작가가 언급한 '비인간적인 인격'으로 인정해야 할 시점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논의의 가장 큰 핵심은 동물이 자연으로부터 온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동물은 인간이 만들어 낸 로봇, 인공지능, 인간의 이성으로 집결해서 만들어 놓은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적 창조론의 원리에서 보자면 동물이 먼저 세상에 있고 마지막에 인간이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이 동물의 존재를 규명하는 일은 자연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다. 인간이 물건으로 취급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화론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빅뱅으로부터 수많은 우연의 겹침으로 탄생한 오늘날의 생명들은 각자 저마다의 우연의 집결체이다. 그 우연의 순간에 인간이 개입한 것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동물을 물건으로 취급할 수 있는 이유는 이론적으로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을 '물건'으로 대했을 때 나오는 폐해들은 단순히 동물을 '먹기 위한 존재'로 규명하여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정의는 인간사의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본래 동물의 존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한 사람과 단순히 동물이 자신의 생계수단으로 생각한 사람의 견해가 다를 수 있으며 이를 좁히는 과정이 쉽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고민과 인간의 생계에 대한 관점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그 공감을 넘어 선 대책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동물을 먹기 위한 존재로 생각하여 그것을 현실적으로 이루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한 상태를 아주 오랜 세월 유지했다면, 또 그로 인해 한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을 반복했다면 그 굴레를 끊어내기는 쉽지 않은 문제다. 다른 생계의 수단이나, 이를 대체할만한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면 이들은 자신의 삶을 박탈당했을 뿐이라고 생각할 뿐, 생명에 대한 논의는 그저 우습기만 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살아있는 동물들이 분명한 생명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생계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들이기 전에 인간과 자연으로 함께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나는 우리의 이 인식이 동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동물이 살아가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누가 먼저 그 논의에 대한 따뜻한 질문을 던지고 대화의 장을 열어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명으로 존재하는 동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나의 반려견 고동이를 닮았다. 꽤 많이 듣는 이야기다. 사람이 아닌 개를 닮았다는 말에 기분이 나쁘냐고? 그렇지 않다. 고동이는 매우 귀엽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람이 개를 닮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나는 언제나 바다로 들어갔던 그 해녀가 떠올랐다. 그저 바다와 함께하는 삶을 받아들이고 살았던 그녀. 무엇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고, 바다에게 무엇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바다와 함께하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그녀는 바다와 닮은 사람으로 살아갔을 뿐이다. 나는 동물을 물건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동물이 존재하는 그대로 동물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동물에게 바라지 않고 또 내가 동물을 통해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동물을 사랑하는 방법. 나아가 생명 존중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아주 조금씩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내가 닮아 있는 나의 삶의 어떤 것을 떠올리고, 그 떠올린 것에 대한 나만의 진지한 생각을 써 내려가면 언젠가 내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들을 찾게 될 것이다. 나와 다른 삶을 사는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은 너무 쉽다. 비극적인 현실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도대체 이 땅에 희망이란 있는 것인가, 탄식하는 일 또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가 해야 할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조금씩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동물에 대해 내가 쓰기로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동물에 대해 생각하면 너무 슬픈 현실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 동물을 물건 그 이하로 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난을 하며 혐오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를 내는 일뿐일까. 그렇게 결론을 내자니 나의 존재가 너무 작게 느껴진다. 우리가 각자 살아온 세월이 안겨 준 만큼, 그 세월 따라 무엇인가로 닮은 모습으로 채워진 나만의 고유한 모습으로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할 수 있다. 지금도 나와 닮은 생명들에 대하여 문장을 완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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