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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Oct 04. 2023

생명의 확장성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이렇게 마음이 항상성을 지배하는 정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각각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 바로 느낌과 창의적 추론이다. 또한 이런 전개는 생명의 목적을 확장했다. 단순한 생명 유지에서 생명체가 지능을 이용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낸 경험에서 얻은 풍성한 행복감을 동반한 생존으로 생명의 목적이 확장된 것이다. ( [느끼고 아는 존재] 안토니오 다마지오, 고현석 옮김, 박문호 감수. 흐름출판 )


생명이 진화를 거듭했다는 이론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과학교과서 때문에 인간이 기어 다녔다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진화의 전부라고 여겼고 그렇게 정착한 나의 관념이 확장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위의 글에서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의식에 대한 진화'를 다룬다. 의식의 진화는 생명의 목적으로 확장하며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로 결론을 맺는다. 우리가 의식하고 그 의식을 통해 도출한 마음은 개인과 공동체에서 생존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책은 한 생명이 객관적으로 살아있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태초에 말씀이 없었다.'라고 단호히 말했던 다마지오의 견해는 인간의 의식의 기원, 그리고 그 의식이 현재 머물고 있는 상태를 파악했을 때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의 연속성을 두고 단 하나의 결과, 즉 단 한마디로 온 세계가 태어났다고 정의하는 종교의 논리가 대체적으로 터무니없는 논리가 아닌가, 하는 결론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여기서 잠깐 논리가 아닌 믿음의 영역으로 확장하자면 태초에 말씀이 없었다는 인간의 논리를 따라갈 것인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인간의 믿음을 따라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개인의 영역이라고 남겨두고 싶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두 가지의 명제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그리고 출발 선상의 모든 움직임은 영원히 밝힐 수 없는 인류의 숙제이므로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들을 존중하는 방향성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내가 안토니오의 글을 언급하는 이유는 단순히 의식의 진화 과정에 대한 논리를 믿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 글에 대한 명확성을 파악하며 읽어나갈 때,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을 새롭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모든 공간은 다양한 모습의 공동체와 조직을 이루어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방 안에 함께 있다고 하자. 이 방은 두 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내가 바라보는 너와 네 주변에 있는 방의 모습, 그리고 네가 바라보는 나와 내 주변에 있는 방의 모습이 그럴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시선은 각기 다른 의식을 만들어낸다. 그 의식으로 작동한 모든 과정 속에서 마음이란 것이 도출되고 이 방 안에서 펼쳐질 대화와 모든 행동의 속성이 우리를 살아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앞서 안토니오가 말했던 생명의 목적은 처음엔 단순히 '생명을 유지' 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마음이 진화하기 전까지 생명으로의 확장성은 그저 죽는 것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안토니오에 따르면 마음은 진화했고 그 마음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 목적을 새롭게 생산했다. 이로써 생명의 목적은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 할 다양한 경험과 그로 인한 공동체의 역할, 개개인의 활동 등에 있다고 보았다. 방 안에 두 사람은 이 방 안에서 서로가 죽을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풍성한 행복감을 찾아야 하며 그 과정 자체가 생명이 유지되어야 하는 목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안토니오의 논리를 잠깐 뒤로하고 창조론의 원리가 생명의 목적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살펴봤으면 한다. 신은 인간이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6일을 일하고 안식일을 지켰다. 그리고 신은 인간에게 지상명령을 내렸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었다.(창세기 1장 28절)  이 모든 명령을 내리기 전에 신이 인간에게 복을 줬다. 신과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을 위해 만든 에덴동산은 인간에게 '할 일'을 제공해 준 노동의 터전, 놀이의 터전이었다. 인간이 살아갈 모든 공간을 인간은 누릴 수 있게 됐고, 신과의 소통을 통해 인간은 행복을 채웠다. 그렇게 영원히 살 수도 있었던 세상이 죄로 인해 무너졌고, 그 무너진 세상은 창조된 세상의 모습이 어그러진 것이 아니라, 신과의 소통이 단절 된 것이었다. 인간은 그 이후 영원히 행복을 찾아 방황하는 존재로, 그러나 때로는 살아가며 크고 작은 신의 뜻을 발견하며, 즉 신과의 소통을 다양한 방법으로 유지하며 생명의 목적을 찾았다. 이쯤이면 인류와 이 지구의 시작이 빅뱅이거나 또는 말씀이거나 하는 문제는 싸워야 할 것이 아니라 '생명의 목적'의 방향성에 대해 과학적 논증 또는 믿음으로 각자가 선택해 살아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의 방향성과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저 살고 있기에 사는 삶인 것인가. 아니면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존재하는 나로 살고 있는가.


공동체와 소통하는 집단, 개인의 자아가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소속감과 연대, 그리고 '존재하는 나'를 고민하며 살아간다. 특히 우리 사회는 이 욕망이 아주 강하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주부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는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고 고귀한 삶이다. 주부로서의 삶 외에  또 다른 일들을 하지 않으면 마치 도태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친구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존재가 꽉 채워짐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나 역시 내 글을 쓴 뒤에 지인들에게 말한다. '심심하면 읽어봐, 너에게 쓸모 있는 글이었으면 좋겠네.' 말을 하고도 이상하다. 쓸모 있는 것을 어떻게 심심할 때 읽을 수 있을까. 필요로 하는 것들을 찾아 헤매는 순간이라면 심심해서가 아니라 바쁜 순간에도 찾게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글을 쓰는 나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언제나 내가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하기를 욕망했던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내가 마음이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순한 생명 유지가 아닌 다양한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 행복감을 위해 목적을 세우기도 하고 꿈을 갖기도 하는데 신기한 것은 그 과정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샘영의 목적이 발현되는 순간을 만난다. 신과의 대화가 가장 큰 행복이었던 에덴동산에서도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온전하게 움직일 때 인간은 행복감을 느꼈다. 그것이 신이 만든 질서였기 때문이다. 그 질서가 곧 생명의 목적이었다.


언젠가 사랑이나 행복 기쁨. 이런 말들이 꽤 불편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 행복을 어떻게 '행복'이라고 딱 두 글자로 쓸 수 있을까.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인가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뇌과학자들이 더 멋진 논리와 이론으로 마음에 대해 많은 단어들로 설명을 해 놓는다고 해도 오늘날 나의 마음에 대해 완벽히 써 내려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개인이 겪는 오늘날의 마음은 켜켜이 쌓인 세월이란 두께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느낌이 있다. 인간과 함께하는 동물도 인간의 깊이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과 유사한 느낌이 있으며 때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마음과도 같은 마음도 있다. 인간이 언어가 없는 동물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이 '마음' 때문이다. 비극은 인간이 이 마음 읽기를 멈출 때다. 마음을 충분히 읽는 과정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이 행복 자체가 생명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것임에도 마음을 방임한다. 방임하는 마음들은 공동체를 냉소적으로 만들며 같은 종족이 아닌 생명에게서 (이를테면 인간이 아닌 동물에 대해) 그들이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빼앗는다. 심지어 인간의 역사는 같은 인간끼리도 생명으로 살아가는 일을 상실시켰다. 


동물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날 생명의 목적을 잃어버린 인간의 공동체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의 기원은 어디에서 왔는가. 당신은 진화를 믿는가, 창조를 믿는가. 그 어떤 논리와 합리화로도 인간인 우리가 동물이 살아가야 할 환경을 박탈할 수 있는 자격은 어디에도 없다. 생명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가치가 이 지구에서 생명으로 온전히 발휘하며 살아가야 한다. 마음을 통해 행복을 목적에 두고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인 우리는 이제 본질적인 생명의 목적들을 위해 고민해야 한다. 앞으로 이 모든 목적을 거스른 우리 사회가 만든 인류만을 위했던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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