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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Oct 03. 2023

명절 전야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하늘이 높아진다. 낮의 해가 조금은 짧아진 것도 같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름의 방황은 저 멀리에 두고 나는 새로운 날들을 탐험하기로 했다. 그때는 언제나 가을이다. 모든 것이 지는 이 날에 나 홀로 새로움을 꿈꾸는 탓에 언제나 세상과의 불협화음이 존재한다. 어린 시절엔 이 불협화음에 대한 불만으로 글을 썼다면 지금은 조금 더 조율하는 글을 쓰고 싶다. 나 역시도 지고 있는 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리라. 누구나 지고 있는 세월을 산다. 꽃이 피는 화려한 시기는 언젠가 떠나간다. 누구든지 세월을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어떻게 서서히 질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를 만난다. 나에게 있어서 매년 가을은 나에게도 그날이 곧 올 것임을 알려준다. 나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다.


오늘은 명절 전야. 뉴스에서는 서울로 가는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 지방으로 가야 하는 서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교통방송국에서 라디오 작가로 일했을 당시에는 명절이면 가장 바쁜 시기였다. 실시간으로 교통상황을 전해야 하고, 사람들이 고속도로에서 오가는 길 지루하지 않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했다. 명절이 다가오기도 한 참 전에 피디와 함께 상의를 하며 만들었던 과정은 힘들기도 했지만 보람찬 일이기도 했다. 특별방송, 특집방송이라는 타이틀로 꾸미는 두 시간의 프로그램은 쏟는 에너지에 비해 언제나 짧게 끝나는 것 같았다. 열심히 준비를 하고 점검을 한다고 해도 엠씨의 역량이 따라주지 않으면 곧바로 좋지 않은 피드백이 따라왔고 이렇게 몇 년을 반복하다 보니 명절이 다가오는 게 썩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즐겁게 방송을 마무리하고 피디와 엠씨 그리고 작가인 내가 한 마음으로 수고했다는 소회를 나누면 그것으로 또 만족했던 일상이었다. 평범한 방송작가로 살았던 나의 명절 전야는 언제나 조금은 긴장되지만 그렇다고 특별하게 여길 것 없이, 그렇게 그런 나를 위해 보낸 시간들이었다.


언젠가 방송을 준비하다가 재미있는 사연을 듣게 됐다. 실제 청취자분께서 보내주신 사연이었는데, 우리는 '장어트럭 사건'이라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촌이 고향이었던 어느 청취자가 명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살아있는 장어를 트럭 뒤에 가득 싣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문제는 장어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 트럭은 제한 속도보다 훨씬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조수석에 있던 아내는 화가 났다. 차가 밀리는 것도 아닌데 마치 정체길처럼 달리고 있는 이 현실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이럴 거면 장어를 왜 사 왔냐, 장어를 팔아서 장사를 할 것도 아닌데 굳이 살아있는 걸 이렇게 들고 가야 하냐.'는 불만을 쏟아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장어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게 됐다는 청취자는 차라리 고부간의 갈등 때문에 싸우는 부부들이 더 부럽다고 했다. 장어 때문에 매년 싸우는 게 힘들다면서 말이다. 청취자는 장어를 태운 트럭 때문에 싸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매번 고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와 싸우는 현실이 너무 힘들다며 사연을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 제작진은 이 사연을 듣고 곧바로 청취자와 전화연결을 했다. 엠씨는 말했다. '장어를 옮기는데 꼭 느리게 운전할 필요가 있을까요?' 청취자는 말했다. '빨리 달리면 장어가 스트레스를 받아요.' 엠씨는 이어서 말했다. '우리 아내분이 느리게 달려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은데요.' 청취자는 답했다. '오늘 하루만 느리면 되는데, 잔소리가 너무 심해서 힘들어요.' 결과적으로 대화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끝났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 장어를 맛있게 먹으려면 최대한 옮기는 과정에서 장어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느리게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장어가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정은 단 한 사람만 행복한 여정일 것 같다는 결론을 맺으며 전화를 끊었다. 매년 명절이면 반복되는 에피소드. 이번 명절에는 이것만큼은 피해야지 하는 모든 일들도 이상하게 반복한다. 나는 때로 사람이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하는 과정을 보며 이토록 무지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장어를 맛있게 먹기 위한 여정.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누군가에게는 헛되고 헛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명절 전야의 모든 행동들도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작년부터였다. 명절에 시골에 가는 일이 생기면 나는 개들이 먹는 간식을 준비했다. 시골에 있는 개들이 좁은 공간 안에 반복된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주인에게 간식을 주며 개를 키우는 방식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로 설명을 하곤 했다. '요즘은 이렇게 키우면 안 돼요.'라고 설명하기도 했고, '강아지들이 불쌍해요.'라는 말로 회유해보기도 했는데, '개는 개일뿐이다.'라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내 의도는 '개는 개여서 이렇게 방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론으로 도달했다. 내가 개들과 그날 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목줄로 산책을 해주는 것. 간식을 주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 등이었다. 개들이 산책을 하고 사람이 주는 건강한 간식을 먹으면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한다는 것을 이 개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주인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동물과 사람이 다른 점은 언어를 사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점이 가장 큰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동물의 언어에 대해 보다 더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들의 입장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람에게 언어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 이 세상의 다른 존재들보다 특별한 지점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특별함은 보다 연약한 존재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의 언어가 그들의 한계를 헤아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개들에게 간식을 주며 대답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 있다. 듣지만 말하지 않는 생명. 내 앞에는 개들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 이런 존재들이 어디 이뿐이던가.


이번 명절에는 개들이 보이지 않았다. 올 초 지자체에서 홍보 전단지가 내려왔는데 개들을 더 이상 방치해서 키우면 안 된다는 지침이 있었다. 방임이 동물 보호법에 위반된다는 사실을 고지했고 시골에서 키우는 개들의 환경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시골에서 평생을 살았던 어르신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개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어떤 방법이 옳은 것인지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불쌍하다.'라는 인식을 넘어 무엇인가 개들을 위해 해야 한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어르신들의 형편 또한 개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싶지만 자유롭지 못한 현실, 아픈 구석이 있지만 제대로 치료받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현실. 오래전에 키웠던 소와 돼지를 팔아 자식들 대학을 다 보냈지만 돌아오는 건 동물을 좋은 환경에서 키우지 않았다는 젊은이들의 피드백이 옳은 말인 줄 알면서도 그야말로 '속 시끄러운 일'이 돼버렸다. 어르신들은 개들을 더 이상 키우지 않기로 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이제 더 이상 시골에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내가 개들에게 주기로 한 간식은 갈 곳을 잃었다. 시골 어르신들은 더 쇠약해지셨다. 누군가를 돌볼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번 명절을 딸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고, 다음 명절에는 아들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송편을 빚었던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개뿐만 아니라 가족이란 존재도 부담스럽거나 불편하거나 그야말로 속 시끄러운 일이 됐다. 이렇게 된 건 개들 때문도 아니고 사람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어딘가에 있지만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헤아림들의 부재 때문이었다.


라디오 글쓰기를 그만두기로 한 날부터 그동안 반복했던 나의 명절 전야도 달라졌다. 조금 더 여유 있게 부모님을 뵈러 갈 수 있었고 그동안 가지 못했던 성묘도 갈 수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사람이 사는 풍경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차에서 들렸으면 하는 노래들을 선정하는 일은 고향으로 가는 길 다른 사람이 무엇을 듣고 싶을까, 를 고민하지 않고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로 채웠다. 부모님의 고향, 나의 고향에 가야 하는 일들을 떠올리며 조금 더 세심하게 헤아려야 하는 사람의 마음, 생명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명절이면 계절이 바뀌고 하늘이 높아지는 이유는 나의 본향에 대해, 내가 지금껏 옳다고 믿었던 모든 아집에 대해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나는 개들의 빈 집을 보며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를 고민했다. 말하지 못하는 동물에 대해 대신 말을 해주겠다고 결심한 그날부터 혹시 사람의 말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정말 생명에 대해 사랑으로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동물에 대한 우리들의 모든 목소리가 결국엔 사람을 위한 사랑의 언어들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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