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괜찮은 작가 imkylim Aug 24. 2024

무제(Untitled)와 영숙쌤

  현대미술품 제목 중 가장 흔한 건 아마도 무제(Untitled). 무제는 관람하는 사람의 상상에 맡기겠다는, 혹은 표현하고 싶은 걸 제목으로 가두지 않겠다는 예술가다운 현학적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설명도 제목도 없어 도무지 알 수 없는 작품 앞에 서면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작가가 귀찮아서 무제라고 한 건 아닐까, 하는 옹졸한 의심도 피어오른다.


  전시회 도록에 넣을 대표작에 제목을 붙이기로 했다. 그림일기로 보아도 무방할 내 작품에는 뭐라 이름을 붙여주면 좋을까. 나는 그림에 날짜와 장소는 물론이고 그릴 때 있던 일과  생각도 적어놓는다.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초단편 소설을 쓴 적도 있으며 지금은 이렇게 신변잡기도 쓰고 있다. 이렇듯 잔뜩 끄적였으며 현학이라든가 신비와는 영 먼 데 위치한 내 그림에 무제라고 붙인다면, 이 무슨 있어보이려는 잔꾀냐는 소리를 들을 법했다.


  문득 생각난 문장, 가영 씨 그림은 아무도 사고 싶지는 않은데 재미있어. 소위 팩트폭격이건만 유쾌하기만 했던 영숙 님의 발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림에 가볍게 웃음 지을 수 있는 면이 있다면 이름 역시 편하게 짓는 게 좋을 거였다. 


  일단 대표작을 골라야 해서 낱장에 그려놓은 그림들을 펼쳐보았다. 몇 장 되지는 않지만 그중 한 그림에 눈길이 머물렀다. 며칠 전 타지로 이사 간 영숙 님을 그린 거였다. 그림 그리던 날의 풍경이 아련하게 떠오르면서 더는 영숙 님의 재치 있는 입담을 들을 수 없다는 섭섭함도 스쳤다. 그 그림을 집어 들고 이런저런 제목을 붙여보았다. 어쩐지 어색했다. 그래서 평소 친근하게 부르던 호칭, 영숙쌤으로 정했다.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이미 충분한 이름이었다.

바깥 풍경 그리는 영숙쌤 @카페 구름

  영숙쌤~

  저 그림 그리던 날 머리 예쁘게 하고 오셨는데 그림에 잘 표현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마음에 든다며 웃어주셨죠. 감사합니다. 전시회 날 뵈어요! ^^     




위의 그림을 그렸던 날 쓴 초단편 '적란운' (https://1pagestory.com/38671/)으로 원페이지스토리 당선(2024. 3월)

이전 10화 자화상을 그려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