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두 페이지를 채움으로써 드디어 저널 북 두 권을 모두 완성했다. 내가 덜 채운 저널 북을 보이며 전시회까지 다 그리겠다고 선언했을 때 우리 어반처스 몇 분이 빙그레 웃었다. 과연? 하는 의심과 격려가 섞인 미소였다. 내가 정기 모임 때 말고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숨찬 여정이었고, 그림과 글이 세련미와 거리가 있지만 땀과 시간을 버무려 일상을 남긴 거라서 뿌듯하다.
카페 단월에서 마신 그림 속 밀크티를 가만히 쳐다본다. 티가 담긴 유리병엔 100% HANDMADE라 적혀 있었다. 강조하고 싶다는 듯 대문자로. 나는 유리병 위의 비닐 포장을 벗기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손으로 했기에 100%라고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차나무를 재배하고 발효 공정까지 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홍차 잎을 직접 우려냈다는 의미겠지. 카페 뒤뜰에 염소가 있다 한들 전용 목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우유를 비롯한 다른 첨가물은 어딘가에서 공급을 받겠지. 다만 자체 개발한 조합 비율에 따라 직접 섞었겠지. 손수 우아한 잔에 따라주었다면 더 섬세한 수제 느낌을 주었을 테지만 대형 카페에서 그런 수고까지는 여의찮았겠지. 그런 상념 속에 밀크티를 마셨다. 부드러웠다.
요즘은 돈만 있다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재화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대량생산, 균일한 품질. 반면 수제는 느리고 소량이며 균일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람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고유의 가치를 동경하는 면이 있다. 수제가 주는 포근한 감성에 끌릴 수밖에 없다. 내 저널 북은 100% HANDMADE일까? 그렇다고 할 배짱은 없다. 나무가 자라 종이로 가공된 뒤 견고한 노트로 묶여 나에게 왔고 그다음부터 내가 빚어낸 거니까. 가만, 이렇게 쓰면서 되짚어 보니 그 역사와 함께 손잡은 듯해 오히려 좋다. 초대장 뒷면에 실린 문구 일부 ‘그리는 동안 작가와 세상이 다정히 손을 잡은 모양입니다’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마지막 페이지를 그린 9월 19일도 더웠다. 조만간 더위가 풀릴 거라는 일기예보를 믿어본다. 문득 재치 넘치는 문구와 멋진 글씨체를 선보이는 작가 원종근 님의 夏夏夏 겁나게 더워도 웃고 살아요, 하는 캘리그래피 작품이 생각난다. 정말 유난했던 이번 여름, 열심히 땀 흘렸다. 그사이 그림과 글을 섞는 재미를 알아버린 나는 밀크티가 된 홍차와 우유처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