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왁자한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그림과 짐을 들고 흩어졌다. 나도 스케치북을 챙겨 가방에 넣은 뒤 차를 세워둔 골목 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 속도가 절로 느려졌다. 몇 분 전까지 그림을 그리느라 앉아 있던 노란 수건 집 앞이었다. 슬그머니 집을 올려다보았다. 어쩐 일인지 대문에 걸려있던 노란 수건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그림과 집을 번갈아 살폈다. 노란 수건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아까는 반쯤 열려 있던 대문이 완전히 닫혀 있었다.
노란 수건은 거칠게 쌓아 올린 층계 위에 있는 집의 반쯤 열린 대문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오래된 집과 산뜻한 노랑의 대비가 마음에 들었다. 접이식 의자와 화구가방을 내려놓고 그 수건을 중심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른 가슴 높이 정도 되는 대문 바로 안쪽, 대각선으로 마주한 철제문 두 개가 보였다. 하나는 현관, 다른 하나는 창고 같았다. 층계 옆 콘크리트 담장에는 거무튀튀한 얼룩이 가득했고 갈라진 틈새와 군데군데 덧바른 자국도 꽤 있었다. 그래도 담장 쪽 층마다 놓인 화분에 심은 고추는 싱그러웠으며 담장과 마주한 철제 난간 바깥쪽 오르막에는 작은 소나무가 있었다. 그 경사진 땅은 집 뒤편 텃밭으로 이어졌다. 곱게 돋은 이랑 위에 가지, 상추, 들깨 등이 보였다.
노란 수건이 없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작고 허름한 단층집이었다. 수건은 저 집에 사는 사람이 일하느라 흘린 땀, 혹은 밭일을 하고 손을 씻은 뒤 젖은 물기를 말리려 널어놓았을 거였다. 어떻게 쓰였든 간에 반듯하게 펼쳐져 햇볕을 받고 있는 수건은 낭만적인 상상마저 떠오르게 했다. 노란 수건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신호, 이를테면 놀러 와, 내지는 나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아, 하는 표식이라고. 저 수건이 내걸리기를 내내 기다리던 친구가 있을 거라고. 조만간 작은 쿠키 상자를 든 누군가가 집에 찾아올 거라고. 안에 있던 주인이 반갑게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하는 장면까지.
나는 피식 웃으며 앉을 자리를 찾아보았다. 내가 선 곳은 노란 수건 집 건너편, 낡은 다세대 주택 출입구 앞이었다. 바로 옆 화단의 키 큰 접시꽃은 벌레가 먹은 듯 이파리에 구멍이 여럿 뚫려 있었고 그 옆으로는 파와 상추가 마구 자라 있었다. 애벌레라도 기어 나올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다세대 주택 덕에 그늘이 드리워졌고 출입구를 조금 비켜 앉으면 두어 시간 있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찌감치 도착한 참가자는 벌써 스케치를 시작하고 있었다. 몇몇은 그릴 곳을 찾느라 이곳저곳을 오갔다. 나는 다시금 노란 수건 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앉아 화구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모자를 벗으려는데 한 사람이 두리번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는 챙이 넓은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 스케치북을 꺼내며 분주한 척을 했다. 그는 정쌤으로 불리는 이 모임의 운영진이었다. 목소리가 크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인데 철도 기관사로 일하다 퇴임했다고 들었다. 사람들에게 소실점이라든가 원근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기에 모임 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한편 그림 실력이 늘지 않는 나에게는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그림 연습을 안 하느냐 물었다. 가을에 정기 전시회가 있으니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번거로운 전시회 전에는 모임에서 나갈 작정이었기에 그런 참견이 편치 않았다. 언제든, 아니 조만간 슬그머니 모임에서 빠지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모임에 나오는 것은 혼자 길거리에 앉아 야외 스케치를 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그가 아무 말 없이 지나가길 바랐다. 모자 아래로 기어이 요란한 디자인의 샌들 끝이 보였다. 내가 아는 남자 중에 형광색 가죽끈을 꼬아 만든 샌들을 신을 사람은 정쌤 뿐이었다. 절로 작은 한숨이 나왔지만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네었다. 그는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다짜고짜 물었다. 여기서 그리려고? 그렇다고 하자 시선을 맞은편 노란 수건 집에 둔 채 말을 이었다. 아, 저 집 그리려는구나. 봐서 잡다한 거는 안 그려도 돼요, 딱 그리고 싶은 부분에만 집중해요, 전봇대 줄도 다 그릴 필요 없어, 색깔도 너무 자세히 넣지는 말고. 내 눈에는 그저 그의 해골 장식이 붙은 굵은 금속 팔찌만 들어왔다. 도대체 저런 소품은 어디에서 구하는 건가, 하는 호기심이 들 정도로 흔치 않은 액세서리였다. 그는 말하는 중간중간 나를 돌아보기는 했지만 내가 귀 기울여 듣든 말든 그건 상관없어 보였다. 내가 성의 없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팔찌만 쳐다보고 있었는데도 말하는 속도를 늦춘다거나 멈추지 않았다.
이 동호회는 따로 지도해 주는 선생도 없는 그야말로 취미로 뭉친 모임이었다. 서로 간에 소소한 정보가 오갔다. 예컨대 구름을 어떻게 표현한 거냐, 이런 색은 어떤 색을 섞어서 만드는 거냐, 어떤 드로잉 펜을 사용하는 것이 좋으냐, 그런 궁금증을 나눴다. 인간관계가 대단하게 얽혀있지는 않았다. 모임 웹사이트에 격주로 정기모임 장소가 공지되면 거기에 모였다가 흩어졌다. 마치 두 시간 남짓의 플래시몹 느낌이었는데 나는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반면 정쌤은 달랐다. 지금까지 모임에 왔다가 다른 회원의 그림에 기가 죽어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이 꽤 있었던 모양이었고, 그는 더는 낙오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게다가 미술 전공자도 아니면서 꾸준한 노력으로 수준을 높인 장본인이기에 남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마침내 정쌤이 말을 멈췄다. 나는 알겠다며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드로잉 펜의 뚜껑을 열고 그림 그릴 자세를 취했다. 이제 집중할 거니까 그만 가세요, 하는 뜻이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손을 허리춤에 둔 채 그대로 서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내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그려야겠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네? 그는 뭘 그렇게 놀라요, 하고 크게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늘 내가 지도를 좀 해 주려고. 내가 당황스러워 눈만 끔뻑이는 사이, 그는 접이식 의자를 펴고 가방에서 화구를 꺼냈다. 나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길어봤자 두 시간,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동요를 들어보면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는 잘도 잔다지 않나.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펜을 들었다.
정쌤은 나를 흘끗 보더니 대담한 건 좋지만 아직 초보니까 연필로 대강 구도라도 잡은 다음 펜으로 하는 게 낫다고 했다.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하얀 셔츠의 소매를 걷었다. 연필로 빠르게 구도를 잡고 그 위에 펜으로 쭉쭉 선을 그어나갔다. 그러고는 알겠냐는 듯 나를 한번 본 뒤 조용하게 그림에 집중했다. 나는 그의 바뀐 분위기가 낯설어 가만히 쳐다보았다. 건너편 집과 스케치북을 오가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거북스러웠던 화려한 샌들이나 팔찌도 길거리 예술가에게 어울리는 소품인 양 느껴졌다. 작업하는 모습만 봤다면 그에게 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두어 시간 만에 현장에서 완성하는 어반 스케치라면 어설프더라도 직접 드로잉 펜으로 그리는 게 나을 거라 여기고 있었지만, 한 번쯤 그의 조언대로 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펜을 내려놓고 대신 연필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