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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쌤과 나는 우리 모임 배너를 세워둔 곳으로 나란히 걸었다.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걷던 정쌤은 나를 돌아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저 사람 우리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왔던 것 같은데요. 마침 나도 쓸쓸하게 층계를 올라가던 귀고르를 떠올리던 중이었기에 흠칫 놀랐다. 귀고르는 그저 구경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는 분명 달랐다. 기대에 찬 눈빛과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짐작건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만약 그랬다면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정쌤은 느릿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다시 말이 없었다.
나도 내 대답이 비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우선 귀고르의 한국어 실력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그가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도 만들어주지 않았다. 만약 귀고르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의사를 명확히 표현했다면 더욱 난처한 기분이 들었을 게 뻔했다. 어쩌면 그랬기에 내 마음속에서 더욱 그를 밀어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엷은 죄책감이 스쳤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사람이었다.
배너 앞으로 모인 멤버들은 길바닥에 각자 그린 그림을 늘어놓았다. 나도 그들을 따라 그림을 두고 뒤로 물러섰다. 언제나 그렇듯 서로의 그림을 보며 감탄과 질문이 오갔다.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넓어봤자 삼십 미터 반경 안에서 그린 작품들인데 제각각 다르다는 게 새삼스레 느껴졌다. 정쌤과 나처럼 같은 곳을 그렸더라도 그랬다. 만약 다들 똑같이 그려냈다면 그게 오히려 괴기스러웠겠지만. 문득 고개를 돌려 회원들을 살폈다. 어디에도 남의 그림을 비웃는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독특한 표현에 대해 놀라워했으며 실력이 나아진 사람을 칭찬했다.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나와 다름에 감탄하고 서로 편하게 묻고 답하는 시간은 너무 많은 것이 극단으로 치닫는 요즘 세상에서 행하는 다양성을 향한 작고 즐거운 퍼포먼스인 양 느껴졌다.
그림을 하나하나 둘러보던 회원이 내게 다가와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내 그림에 적힌 글귀가 좋다며 빙긋 웃었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렇지만 머릿속에서는 내가 쓴 글귀를 가리키던 귀고르가 떠올랐다. 읽어달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일부러 무시했었다. 귀고르의 집에 동화 같은 상상이라니 너무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았으며 그걸 귀고르가 알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사실 그의 집이라는 것을 진즉 알았다면 그릴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순간 귀까지 달아오르는 듯했다. 어이없었다. 끼리끼리 편 가르기가 싫다던 나 아니었나? 심지어 귀고르는 우리에게 혼자 다가오느라 굉장한 용기를 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정쌤이 옆으로 다가와 내 그림을 전시회에 걸어도 좋겠다고 했다. 같은 현장에서 그린 그림끼리 모아서 전시할 예정인데 인당 세 작품 이상 걸어야 한다는, 그러니 앞으로도 꾸준히 나와서 그렸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쩐 일인지 이제 그런 말이 진저리 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한 점이라도 보탠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정쌤에게 전시회 행 승차권을 받겠다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정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열차는 전시회, 전시회 행입니다. 중간에 내리지 마시고 끝까지 여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옆에 있던 한 회원이 누구나 탈 수 있지요? 하고 물었고, 정쌤의 대답은 그럼요! 외계인도 가능합니다! 였다. 회원들은 그 대답에 왁자하게 웃었지만 나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정쌤이 갑자기 말을 거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던 생각은 외계인이라는 단어 앞에서 다시 나를 붙들었다.
모임이 끝나고 내 차가 있는 골목 쪽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왠지 무거웠다. 나의 귀고르에 대한 태도는 A 정당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고 내가 외면당했던 날 친구들이 괜히 맥주와 안주로 눈길을 돌리며 나를 피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벽 너머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듯,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섣불리 선을 그었다. 내 상상과 달라 실망했으며 그의 이름을 마음대로 귀고르라 단정했다. 더군다나 러시아에서 왔다는 그의 대답에 눈을 피했다. 선량한 러시아인도 많을 텐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정쌤의 외계인도 올 수 있다는 말은 나의 편협함을 꾸짖고 있는 듯했다. 한숨이 나왔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귀고르의 집 앞이었다. 더는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이라 단정했던 내 마음이 떠올랐다. 불현듯 이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케치북을 열어 ‘노란 수건 집의 주인도 만났다’라고 한 줄을 더 적었다. 여전히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들어 귀고르의 집을 다시금 쳐다봤다. 잠시 망설이다가 가방을 열었다. 노란 포스트잇 메모지를 꺼내 조금 큰 글씨로 또박또박 전시회 장소와 날짜를 적었다. 조심스레 층계를 올라갔다. 내 마음이 온전히 전해질지, 마치 어려운 타인의 방에 노크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귀고르도 그랬겠지, 아니 어쩌면 더. 안쪽에서는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얼른 대문에 메모지를 붙이고 돌아섰다. 서둘러 층계를 내려오다가 멈췄다. 다시 올라가 메모지 하단에 우리 모임의 웹사이트 주소와 함께 글자를 더 적었다. 함께 그리고 싶으시면 언제든 나오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