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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려 펜을 멈추고 정쌤 쪽을 흘끗 살폈다. 나는 아직 스케치를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정쌤은 이미 채색을 하고 있었다. 집을 둘러싼 하늘과 텃밭, 땅 부분은 물을 많이 머금은 붓으로 빠르게 칠한 반면 집과 층계에는 초벌 채색 위에 세밀하게 색을 얹었다. 나도 모르게 정쌤의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멍하고 보는데, 정쌤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붓을 계속 놀리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의 그림 많이 보는 것도 좋아요, 그런데 이렇게 자신 있게 그리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거예요. 집에서도 수시로 휴대폰이고 안경이고, 눈에 보이는 걸 자꾸 그려보세요, 그 방법밖에는 없다니까. 스스로 자꾸 해 봐야 해.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내가 넋 놓고 쳐다본 걸 정쌤이 눈치챈 게 어쩐지 부끄러웠고 그의 수다가 다시 시작된 것도 싫었다. 조금이나마 생겼던 호감이 단번에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나도 어엿한 어른인데 언제부터 친했다고 자꾸 반말을 섞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면 그걸 보면서 내가 배우고 싶은 부분만 취할 수 있을 거였다. 각자 그렇게 할 일을 하면 되는데 정쌤은 왜 쓸데없는 기력 소모를 하는 건지. 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내가 운영하는 약국에 왔던 정쌤을 떠올렸다. 정쌤은 마스크를 쓴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피로회복제와 종합영양제를 샀다. 챙겨 먹으면 좋기야 하지만 저렇게 참견하고 다니느라 피곤해서 비타민이 절실히 필요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공연히 뭐라고 대답이라도 했다가는 말이 길어질 게 뻔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내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쌤의 그림을 한참 봐서 그런지 내 그림이 영 시원치 않아 보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쌤은 꾸준히 그리다 보면 나처럼 잘 그리게 될 거예요, 하며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겸연쩍어 입을 삐죽이며 정쌤처럼 그리고 싶다고 한 적 없거든요, 했다. 그는 고개까지 젖혀가며 크게 웃고는 착각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도 모르게 나온 불퉁한 말투에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유쾌하게 웃어서 조금 무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말문이 다시 터진 정쌤은 우리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끼리 모여서 그림을 그리니 얼마나 좋으냐고, 친분도 쌓으면 더 좋을 거라고, 여기 멤버 중에 성격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꽤 괜찮은 사람이 많지 않냐고. 나는 그의 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최근 들어 끼리끼리라는 말이 거북했다. 비슷한 성향의 무리에 있으면 말이 통하니 편안하고 비교적 안전하다는 건 알지만 그게 요즘은 너무 심한 것 같아서였다. 정치 성향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서 상대 진영을 덮어놓고 깎아내리는 모습이 불편했다. 인간관계를 넓힌다는 소셜네트워크는 종종 목소리 크고 영향력 있는 소수가 올린 내용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어코 관계의 나눗셈을 키우고야 마는 경우도 많았다.
언젠가 비 내리던 날이었다. 친구들과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며 연예 기사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맥락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치 이야기로 이어졌다. 한 친구가 A 정당은 무조건 싫다는 식의 발언을 했고, 몇몇은 끄덕임으로 적당히 호응했다. 나도 A 정당에 대해 나쁘게 여기는 부분이 있었지만 친구의 몇몇 발언은 맹목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뉴스에서 들었던 A 정당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를 슬며시 흘렸다. 반박은 없었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한 친구가 고개를 모로 젓고 흘기듯 나를 꼬나보며 너 A 정당 지지해? 하고 따지듯 물었다. 나는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뉴스에서 나온 말을 무조건 맞다고 여겨서 하는 말은 아니라고, 그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은 거라고.
불쾌한 기분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이미 내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친구들은 괜히 맥주를 들이켜고 안주를 입에 넣으며 내 눈길을 피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연예인이 소속사와 갈등이 있다더라, 사귀던 누구와 헤어졌다더라, 그런 뉴스에 대해 여러모로 추측 해가며 의견을 나누듯 정치 기사에 대해서도 그러자는 뜻일 뿐이었다고 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이겨내기 버거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다. 그 뒤로 단체채팅방에 모이자는 이야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나를 뺀 멤버끼리 때때로 모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채팅방을 나와버렸다.
요즘 그런 분위기가 어디에나 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이 있고부터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꼈다. 그간 쌓인 시간이 어떻든 생각이 다르면 대수롭지 않게 선을 긋는 관계라니. 아마 친한 사이라고 믿었던 그룹이라 더욱 그랬을 터였다.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도움도 받을 필요 없이 재주껏 사는 게 깔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무관한 일에는 그럴 수도 있지,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특별히 미움받을 일이 없었다. 점점 내 인간관계의 반경이 좁아질 수도 있지만 끼리끼리 쑥덕대는 무리에 끼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나는 정쌤이 하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부지런히 펜을 움직였다. 그제야 정쌤도 머쓱한지 입을 다물고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얼마 뒤, 노란 물감으로 수건만 간신히 칠했는데 정쌤이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되어간다고 했다. 나는 팔을 쭉 뻗어 그림을 멀찌감치 들고 노란 수건 집과 비교해 보았다. 연필로 구도를 간단하게라도 잡고 그려서인지 얼추 비슷해 보였다. 확실히 이전 그림보다는 나았다. 으쓱해져서 그림 하단에 날짜와 ‘동화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노란 수건 집을 그리다’라는 문구도 적어넣었다. 정쌤은 나의 그림을 보더니 꽤 괜찮다고 칭찬했다. 나도 그의 그림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아 고개를 들었다. 한 남자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햇빛에 그은 피부에 삭발 수준의 짧은 머리를 한 남자였다. 동남아 쪽은 아닌 것 같은데 중국인이나 일본인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여간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드러난 팔과 다리에는 근육이 잡혀 있었고 눈은 빛났으며 귀에는 자그마한 귀고리까지 하고 있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쉰은 넘었을 것 같았다. 나는 정쌤에게 앞을 보라는 눈짓을 했다. 정쌤은 특유의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노란 수건 집에서 나왔다는 듯 손가락으로 집을 가리키는 남자를 향해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허락도 없이 그렸어요. 괜찮으시죠? 우리 앞에 가까이 온 남자는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빙긋 웃더니 어눌한 한국말로 자기가 저 집에 살고 있으며 이름은 무슨 고르라고 했다.
확실하게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 묻지는 않았다. 귀고리를 했으니 그냥 내 멋대로 귀고르라 넘겨짚기로 했다. 어쨌든 외국인이라는 게 분명해졌고,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를 외국인노동자라 여겼다. 몸의 근육은 건설 현장처럼 몸을 쓰는 곳에서 일하며 생겼을 터였다. 이어 내 머리에는 불법체류, 가난, 범죄, 마약, 그런 낱말들이 맴돌았다. 눈만 끔뻑이는 나와 달리 정쌤은 귀고르에게 스케치북을 내밀어 그림을 보여주었다. 귀고르가 그림을 살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정쌤은 스케치북을 넘기며 예전에 그린 그림까지 보여줬다. 두 남자가 머리를 맞대고 그림을 보는 모습에 긴장이 다소 누그러졌다. 얼른 그리던 그림이나 완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뒤 귀고르는 나를 보더니 내 스케치북을 가리키며 말했다.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이 조금 우스웠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그림을 살피는 그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귀고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떴다. 이내 고개를 들더니 러시아에서 왔다고 했다. 이어서 뭐라고 더 말하긴 했는데 나는 순간 아직도 진행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을 떠올리느라 듣지 못했다. 푸틴의 오 선 확정 뉴스, 러시아 반정부 운동가 나발니의 옥중 사망 사건에 이어 용병 단체인 바그너 그룹과 프리고진에 대한 기사, 세계 곳곳에서 심해지는 대립 구도에 대한 기사도 기억났다. 어떤 입장의 사람일지 알 수 없는 그와 가까이 있는 상황이 불편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정쌤이 우리 모임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귀고르가 알아듣든 말든 우리 가야 해요, 바이 바이, 하며 손짓했다. 정쌤이 무척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정신이 들어 귀고르에게 최대한 선한 미소를 지으며 바이, 하고는 바삐 화구를 가방에 넣었다. 귀고르는 멈칫대다 이내 물러섰다. 짐을 챙겨 일어서다가 나도 모르게 노란 수건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층계 중간에 서서 우리를 보고 있던 귀고르는 얼른 몸을 돌려 화분의 고추를 하나 따더니 층계를 마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