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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용도실에 쉰내가 가득했다. 며칠간 쌓아둔 빨랫감에서 나는 냄새였다. 혼자 지내는 데다 요즘은 반바지와 티셔츠 위주로 입어서 양이 많지도 않거니와 최근 들어 비가 자주 와 세탁을 미룬 탓이었다. 오늘은 날이 맑으니 빨래를 하는 게 좋을 터였다. 나는 세탁기에 빨래와 세제를 쏟아 넣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집 안을 청소한 뒤에는 저녁에 먹을 채소를 따러 텃밭에 가 볼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해 주던 음식, 고추장과 신선한 채소를 듬뿍 넣은 비빔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였다.
청소기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작은 창문 밖으로 눈길이 갔다. 한 여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서 살짝 비켜섰다. 여자는 다세대 주택 앞 그늘에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앉았다. 가방을 열어 스케치북과 펜 같은 것도 꺼냈다. 잠시 뒤 어떤 남자가 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 역시 내 집을 쳐다봤다. 팔을 뻗어 내 집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무어라 이야기했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네에서, 아니 한국에 와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조심스럽게 창가로 한 발 가까이 가서 바깥을 살폈다. 그림을 그리거나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유화를 전공한 아내가 풍경을 그리러 야외로 나가면 소풍 삼아 따라가곤 했던, 나중에는 아내에게 배워 함께 그림을 그렸던 추억이 떠올랐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할린 동포, 나는 한국에서 그렇게 불렸다. 한국에 들어온 지는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 이송되었던 나의 부모는 탄광에서 일하며 가족을 일구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으로 오랜 기간 무국적 상태를 유지했고 자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 강조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더욱 그랬다. 발전한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똑똑해야 한다고 자부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나는 대학 교육까지 받았고 건축회사를 운영했다.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으며 손주까지 있었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사업이 진행되었다. 드디어 우리 가족에게까지 기회가 왔을 때,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 한국행을 택했다. 내 입에서 절로 나온 말은 저도요, 였다. 아내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건축회사도 꽤 잘 되고 있었기에 그걸 놓고 가면 어쩌느냐고, 러시아에 살고 있는 가족은 중요하지 않느냐고 나무랐다. 나는 끈질기게 한국 땅에서 지내보고 싶다며 아내를 설득했다. 마침내 아내는 나에게 삼 년의 시간을 허락했다. 삼 년 안에 남은 생을 러시아에서 지낼지, 한국에서 지낼지 결정하자고 했다. 아내야 내가 하루라도 빨리 포기하고 러시아로 돌아오길 바랄 테지만 나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는 순간에도 잊지 못했던 한국에서 사는 것이 나의 도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한국 정부가 마련해 준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지냈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인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그저 모든 상황이 고맙고 좋다는 말을 반복했고, 나 역시 아버지가 그토록 꿈꾸던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마냥 흐뭇하다는 어머니와 달리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 와서도 사할린에서 알던 사람들과만 소통하며 지낸다는 게 답답했다. 더군다나 나는 한국의 사회구성원으로 역할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도 많은 데다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서 그럴듯한 직장을 구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괜히 푼돈이라도 벌다가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받지 못할까 우려스럽기도 했다.
생각해 낸 것은 자원봉사였다. 나는 우리의 이주를 도와준 기관에 통역 봉사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다. 다행히 통역 인력이 필요한 곳은 많았고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 이민자를 돕는 복지관, 경찰서나 병원에 나갈 수 있었다. 한국어는 어눌할지라도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한 덕이었다. 한국에서 남에게 도움 주는 일을 할 수 있어 뿌듯했다. 복지관에서는 내가 영어까지 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무척 반기며 예전보다 공손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영어 회화 공부를 하고 있다는 복지관 과장과도 곧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말했다. 러시아 사람인 내 아내는 한인들만 모여 사는 아파트를 견디기 어려워할 것이므로 언젠가 아내를 데려오려면 독립된 집이 필요하다고. 그는 반색하며 한동안 비워둔 집이 있는데 가보자고 했다.
바로 과장과 함께 집을 봤다. 한눈에 투박하고 거무튀튀한 층계, 녹슨 난간, 뒤편으로 이어지는 거친 땅이 보였다. 현관을 열자 집 안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났으며 곳곳에 거미줄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과장은 민망했는지 창문을 열어젖히며 사람이 안 쓰니 금세 이 지경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거실 구석에는 아이들의 키를 잰 흔적이, 오래되어 흐릿해진 유리창과 민트색 창틀에는 깔끔하게 떼어내지 못한 스티커 자국이, 창고와 다용도실에는 군데군데 곰팡이 흔적이 있었다. 바닥도 지저분했다. 괜찮았다. 오히려 그런 흔적에 내가 아이들을 키우던 젊은 시절이 떠올라 정겹게 느껴졌다. 내 표정을 살피던 과장은 슬그머니 웃으며 월세를 낮게 받을 테니 대신 집 관리나 잘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단박에 계약했다. 그러곤 집에 정성을 쏟았다. 텃밭을 공들여 가꾸고 삐걱거리는 문과 바닥을 고쳤으며 빗자루로 층계도 자주 쓸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지낼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창밖을 살폈다. 그 사이 남자와 여자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길은 내 집과 각자의 스케치북 사이를 계속 오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내 집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멋지게 그려달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들의 모습을 계속 응시했다.
세탁기에서 물 빠지는 소리가 났다. 퍼뜩 정신이 들어 창가에서 물러났다. 다용도실 구석에 놓인 청소기를 집어 들고 거실로 나가 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먼지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거슬렸다. 나는 청소기 전원을 끄고 우두커니 섰다. 아무래도 그들의 그림이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나가서 당당하게 그림을 보고 싶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내 집을 그리는데 그 정도는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쉽사리 현관 쪽으로 가지 못했다. 아직은 복지관이나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사람들 말고는 한국인과 직접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청소기를 손에 잡은 채 이번엔 거실 창가로 다가갔다.
여자와 남자는 여전히 그대로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핏 Urban sketchers(어반 스케처스)라고 적힌 천을 지지대에 세워놓은 게 보였다. 그 근처에도 세 명이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하,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청소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얼른 휴대폰을 찾아 ‘어반 스케처스’를 검색해 보았다. 많은 글과 동영상이 떴다. 링크 하나를 클릭해서 읽어보았다. 어반 스케처스 선언문이었다. 그중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함께 그린다, 는 항목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모임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러 나라 사람이 모여 각자 그림을 그린 뒤 함께 그림을 감상하는 과정을 담은 동영상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 그림을 두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무척 보기 좋았다. 모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듯했다.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모임 일정에도 언제든 참여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림을 구경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나도 저 그룹에 속하고 싶었다. 한국에 와서 적응하느라 붓을 잡지 못했던 내게 이제 다시 그림을 그리라는 하늘의 뜻으로 저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난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인과 교류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테고 아내가 한국에 왔을 때 저런 모임에서 나와 함께 활동한다면 한결 쉽게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림을 두고 저들 속에 섞여들어 함께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보고 얼굴에 묻은 것은 없는지 살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옷장을 열어 잘 다려놓은 깨끗한 옷을 꺼냈다. 모름지기 첫인상이란 중요한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