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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으로 들어서며 얼떨결에 딴 고추를 내려다보았다. 하필 아직 덜 자란 거였다. 고개를 내저으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거실 창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청소기를 보자 아까 집을 나서기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래 봬도 내가 젊은 시절에 꽤 인기가 많았지, 하며 고개도 치켜세워보고 한국말로 어떻게 인사할지 연습하며 들떠 있었다. 나는 식탁 위에 고추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눈을 감고 그들에게 다가갈 때 일부러 미소를 가득 머금고 씩씩하게 걸어갔던 내 모습을 되짚어 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들은 분명 친절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특히 남자는 금방 그린 내 집뿐 아니라 스케치북을 손수 한 장씩 넘겨 가며 예전에 그린 것까지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전통시장, 골목길, 카페, 식당, 공원 등 다양한 장소가 담겨 있었다. 특히 기찻길, 기차 안의 사람들, 기관실 등 기차 관련 그림이 많았다. 그들과 활동하면 어울려 기차를 타고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며 그림을 그리겠구나, 싶어 잠시 설레었었다.
남자의 친절에 살짝 용기가 생긴 나는 여자에게도 그림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림을 건네는 여자의 무표정에 다시금 긴장되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그림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직 채색까지는 진행하지 못한 상태였다. 색을 넣은 곳은 오로지 한 곳, 노란 수건뿐이었다. 하단에 뭐라고 글씨도 적혀 있었는데 흘려 쓴 글씨라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직은 정자로 쓰인 한글만 더듬거리며 읽을 수 있는 나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키며 그녀를 쳐다봤다. 읽어줄 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이고르입니다, 나는 이 집에 삽니다, 라는 말을 하고 나자 더는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한국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더듬거리더라도 조금은 더 할 수 있건만 왠지 그때는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나는 그녀의 그림 위 문구를 가리키던 손을 거두어 이마를 긁적였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고민스러웠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일 텐데 나의 국적은 러시아, 나의 부모는 사할린 교포. 그러니까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의 생김새도 그렇지만 성씨인 ‘김’은 내가 한국인의 아들임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여겼다. 그러나 서툰 한국말로 이런저런 설명을 한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든 태어나고 오십 년 넘게 살아온 곳은 러시아였다. 나는 대답했다. 저는 러시아에서 왔습니다. 여자는 움찔하더니 입을 앙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내가 얼른 부모는 한국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지만 여자는 다만 고개를 모로 돌릴 뿐이었다.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운 찰나, 남자가 나에게 인사했다. 그들과 헤어질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아쉬웠지만 뒤로 물러섰다. 짐을 챙기는 동작이 사뭇 빠르고 가벼운 걸 보아 여자는 자리를 이만 피할 수 있어 안도하는 듯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얼굴과 머리에 끼얹었다. 찬물에 흘려보내듯 다 잊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물기를 닦으며 거울에 비친 한국인과 다름없는 내 얼굴을 보는데 조금 전의 일이 또 생각났다. 내가 김씨 성이라는 점에 대해 남자도 여자도 더 묻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섭섭한 일이었다. 한국 성씨를 가졌지만 이름이 이고르라는 것에 놀라워하길 바랐었다. 그러면 나는 부모가 한국 사람이라고, 그래서 생김새도 한국인과 같은 거라고 말하려 했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길 기대했지만 그건 나의 순진한 착각 속 시나리오에 불과했나 보았다. 어쩌면 내가 동포라는 게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내 어눌한 발음을 못 알아들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애써 생각해도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입에서 쯥,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통역 봉사를 한답시고 정작 내게 필요한 한국어 공부는 소홀히 한 것도 후회스러웠다. 그나마 자주 만나는 과장과도 영어로만 이야기했으니. 어쨌든 그들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볼 수도 있었고 번역 앱을 들이밀며 대화를 시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아까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다음 기회에 함께 그림을 그려도 괜찮을지 묻지 못했다. 아니, 공연히 어색한 거절을 당할 수도 있었을 테니 묻지 않길 잘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나에게 베푼 친절 그 이상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도대체 뭘 기대했던 거냐고 나에게 비아냥거리며 되묻고 싶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창밖을 보았다. 그들이 사라진 골목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어쩐지 텅 빈 기분이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저쪽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림을 보며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대문에 널어놓았던 노란 수건을 거두었다. 어제 오후에 텃밭에서 일하느라 목에 둘렀던 노란 수건이 땀으로 젖어 대문 위에 놓고는 잊고 있었는데 그게 쓸데없이 남들의 시선을 끈 것 같아서였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우두커니 서 있자니 벽시계의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커다랗게 울렸다. 나는 시계 옆에 걸린 가족사진을 가만히 보았다. 유리 액자는 먼지도 없이 깨끗했지만 손에 쥔 노란 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았다. 웃고 있는 아내 나탈리아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순간 눈가가 뜨거워지며 목울대로 뭔가가 치고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