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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작가 imkylim Dec 06. 2024

환승의 시간1화_의정부전국문학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

  바텐더는 말했다. “이제 머금었던 위스키를 목으로 넘긴 뒤 올라오는 향을 느껴보세요.”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내 귀에 들어온 그의 느끼한 목소리를 귀지 파내듯 긁어내고 싶었다. 여자들은 아닌가 보았다. 그의 말에 집중하면서 한껏 들뜬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곧이어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뻐끔거리며 후각에 집중하는 시늉을 했다. 마시기 전에 맡았던 향과 다르지 않냐는 바텐더의 물음에 한 여자는 놀랍다는 듯 눈썹까지 치켜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여자는 혀가 얼얼해서 잘 모르겠다며 혀짧은 소리를 냈다. 바텐더는 손을 입가에 올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술을 자주 즐기지 않는 분에게는 도수가 높아 그렇게 느껴질 수 있죠, 하고는 커피에 애프터테이스트가 있다면 위스키에는 피니시가 있다고 덧붙였다. 관심을 가지고 여러 번 마시다 보면 위스키만의 독특한 맛과 향, 그리고 여운을 저절로 느낄 수 있게 되니 그저 즐기듯 천천히 음미하라고도 했다. 


  나는 손에 쥔 술잔을 슬그머니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내가 앉은 자리는 바 테이블 구석이었고 고개를 비스듬히 들면 두 여자와 바텐더가 보였다. 딱 보아하니 여자 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어제를 남자 없이 보냈고, 몇 시간 남지 않은 오늘이라도 어떻게든 의미 있게 지내고 싶어 하는 듯했다. 두 여자는 싱글몰트 입문자라며 바텐더에게 적당한 것으로 추천을 부탁했다. 바텐더는 글렌모렌지 12년 어코드와 글랜캐넌 노징글래스를 꺼냈다. 어슴푸레하면서도 야릇한 조명 아래 놓인 그것들을 보며 여자들은 예쁘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경쾌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말했다. 어코드는 버번과 쉐리 오크로 각각 숙성시킨 뒤 병입할 때 혼합한 것인데 그걸 매링이라 부른다고. 한 여자가 매링? 결혼? 하며 깔깔댔고 바텐더는 둘이 하나가 되는 거죠, 하고 답했다. 어떤 위스키는 여러 오크통을 환승하듯 거치며 한층 오묘한 향과 맛을 더하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둘이 하나가 된다, 환승한다, 그런 표현들에 실소가 튀어나왔다.


  그는 아까부터 마시기 전에 향을 먼저 맡아봐라, 스월링한 뒤 또 맡아봐라, 하며 끊임없이 위스키의 향에 대해 떠들었다. 마치 후각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양 보일 정도였다. 나는 향에 민감하지 않지만 그걸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남들이 냄새에 대해 말하면 대강 동의하고 넘어가곤 했다. 어차피 후각이란 주관적이고 순간적이라서 믿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런데도 바텐더는 이제 위스키를 삼킨 뒤의 피니시까지 운운했고 여자들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사기꾼 같은 그의 수작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준수한 얼굴에 옅은 화장까지 했다. 흰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몸은 한눈에 봐도 날렵하고 다부졌다. 은은한 조명 아래 어두침침한 분위기 탓인지 셔츠 안쪽으로 보이는 목 언저리, 그리고 술을 따르는 손은 유난히 깨끗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먹기 편하게 잘라놓은 버터 조각이 생각났고, 나는 녀석을 ‘버터’라고 부르는 게 딱 맞을 것 같았다. 바(bar)와 텐더(tender)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 얼추 상통하는 것 같으니 걸맞는 호칭이었다. 바텐더의 정확한 어원이나 의미가 어떻게 되든 그런 것까지는 상관할 바 아니었다.


  버터 녀석을 자세히 살펴볼수록 술맛이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앉아 있을 셈이었다. 버터와 두 여자가 술을 매개로 주고받을 말은 많을 터였고 음악도 분위기를 돋울 거였다. 더구나 손님은 그 여자들과 나뿐이었다. 내가 부르지 않는 한, 버터는 기꺼운 마음으로 여자들 앞에서만 알짱거릴 게 뻔했다. 그들을 훼방 놓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복잡한 내 머리를 다소 비울 겸 두 여자와 버터가 서로의 마음을 흔드는 꼴을 구경하면서 마음껏 비웃고 싶었다. 속으로 응원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 뭐 별거 있어? 치기에 원나잇이든 스리섬이든 무슨 상관이겠냐고. 너희들이야 같이 붙고 싶은 마음뿐이겠지.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서로 필요한 것만 취하면 되는 관계, 하고 읊조렸다. 그러다 지금 내가 술잔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아있게 만든 여자를 떠올랐다. 영미였던가 경미였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와 나의 관계도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말하자면 책임감과 깊이 아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소위 진실한 관계라 불리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느닷없이 떠오른 진실이라는 낱말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녀가 뜬금없이 수잔이라 불러달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나는 진즉 그녀가 믿을 만한 여자일지 의심하지 않았던 게 후회스러웠다. 그녀는 외국에 대한 동경을 가득 품은 허영심 덩어리에 불과했는데. 여하튼 거의 일 년 가까이 동거했던 수잔은 오늘 아침 나를 떠났다. 아니, 어제저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없어졌으니까. 내가 그녀를 옆에 붙잡아 두고자 노력했던 시간을 떠올리자 치가 떨렸다. 며칠만, 단 며칠만 더 머물렀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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