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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작가 imkylim Dec 11. 2024

환승의 시간2화

  오늘 아침, 잠결에 옆으로 손을 뻗었는데 수잔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슬쩍 눈을 떴다. 침대 구석에 그녀가 떨어뜨렸을 붉은 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 한 올만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녀를 더듬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다시 베개로 머리를 묻고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아무런 일정이 없으니 더 자고 싶었다. 그런데 집이 너무 조용했다. 커피를 내리거나 빵을 굽는 토스터 소리는 물론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거실로 나갔다. 수잔, 아침 뭐 먹어?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 서재, 다용도실을 살폈다. 집안 어디에도 수잔이 없었다. 나는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아무 말도 없이 아침부터 어딜 나간 거야?


  전화라도 해 봐야 할 것 같아 휴대폰을 찾으러 거실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크리스마스트리 아래로 설핏 빨간 상자가 보였다. 고개를 숙여 다시 쳐다봤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상자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크리스마스 선물 따위 주고받지 말자고 수잔에게 누차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바로 열흘 뒤면 오롯이 나를 위한 날인 내 생일이니 그때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 놓고 어제 그녀에게 선물이라며 실크 원피스를 안겨주었다. 진즉부터 계획했던 건 아니었다. 며칠 전, 처음 만났던 때보다 그녀의 몸에 군살이 붙은 것 같다는 내 핀잔에 수잔은 고작 일 킬로그램 늘었을 뿐이라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나는 사과하는 척 원피스를 사서 들이밀었다. 내 속내는 조만간 그걸 입어야 하니 몸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원피스에 대한 보답으로 급하게 내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멋진 크리스마스 브런치를 위해 마트에 갔는지도. 혹은 체중 감량을 위해 일찌감치 한강으로 조깅을 나갔는지도.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게 흐뭇했다.


  상자는 뭐가 들은 건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흔들어봐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솜 뭉치를 가득 채워 넣고 가운데에 작은 무언가, 이를테면 반지 같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요즘 그녀와 언제쯤 헤어지면 좋을지 가늠하던 터였다. 아직 내 생일이 며칠 남았으니 섣불리 행동할 수 없어 티를 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괜히 곤란한 걸 주고받고 싶지는 않았다. 입에서 쯥,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그래도 별수 없었다. 대처방안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열어보는 게 나을 터였다. 


  한숨을 내쉬며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나는 순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고개를 모로 저었다. 안에 든 거라곤 붉고 굵게 ‘안녕.’이라는 글씨가 적힌 노란 포스트잇뿐이었다. 안녕이라니, 게다가 마침표는 유난히 크게 찍혀 단호해 보이기까지 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는 상자를 바닥으로 집어 던지고 발로 짓이기듯 밟아버렸다. 옆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도 힘껏 쳐서 쓰러뜨렸다. 색색의 반짝이는 장식용 전구가 바닥으로 흩어지며 사방으로 굴렀다. 쓰러지고 데굴거리는 소음은 오래지 않아 그쳤지만 내 심장은 요란하게 뛰었다. 발끝으로 전구 하나가 굴러왔다. 거기에 화난 내 모습이 일그러져 어른거렸다. 눈을 감고 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슬리퍼 아래로 얇은 유리가 힘없이 바스라졌다.


  그녀가 하필 내 생일을 앞두고 떠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생일 파티에 지인들을 초대했고, 그녀가 돋보일 만한 값비싼 코발트블루 색상의 원피스까지 마련했다. 어제 그 옷을 입고 내 앞에서 온갖 교태를 부리던 모습을 떠올리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머리 깊숙이 양손을 집어넣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휴대폰이 놓인 거실 테이블로 갔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가 이어지다 툭 끊겼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휴대폰을 소파에 던지려다 이를 악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고, 일단은 다시 들어오라고.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거실을 맴돌았다. 너는 돌아오지 않을 도리가 없어. 반드시 돌아올 거야, 하고 주문을 걸듯 중얼거렸다. 수잔이 음악계에 인맥을 넓힌 것은 순전히 내 덕이었으며 그녀는 그걸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을 거였다. 설핏 그녀는 내가 소개한 사람들과 나 없이도 가끔 술자리를 갖는다거나 협연을 하는 등 꽤 친밀하게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대학 출신에게는 특히나 깐깐하게 구는 동료 바이올리니스트까지 그녀와는 거리낌 없이 지냈다. 어쩌면 인맥은 충분히 쌓았다고 여겼거나 나보다 나은 사람을 찾은 걸지도. 나보다 나은 사람? 호흡이 다시금 흐트러졌다.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나쁜 년! 


  아니, 그럴 리는 없지,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 주제에 어디에서도 나보다 나은 남자를 찾을 수는 없을 거였다. 조만간 돌아와 내 앞에서 잘못을 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안절부절 휴대폰을 쳐다보는 내 모습이 한심해 텔레비전을 켰다. 여러 채널에서 크리스마스라 떠들어댔다. 존경과 사랑을 담아 손을 모으고 조아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화면에 나타났다. 문득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일에 세계인이 기뻐하는 것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결국 기분만 더 상해 텔레비전을 껐다.


  날이 어두워지도록 수잔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거실을 서성이던 나는 그녀가 쓰던 서재로 들어갔다. 그녀 물건을 몽땅 버릴 생각이었다. 돌아오더라도 내가 먼저 단호하게 그녀를 대하리라 결심도 했다. 그래야 다음부터는 나를 두고 제멋대로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녀가 쓰던 책상 서랍부터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이어 옷장 문을 부술 듯 열어젖혔다. 거기엔 어제 내가 그녀에게 준 원피스만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순간 그녀의 체취가 코를 스치듯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그녀가 입었던 그 매끄러운 원피스를 꽉 쥐고 코에 가까이했다. 이상했다. 내가 맡았던 게 그녀의 체취인지 아닌지 모호했다. 그녀의 냄새를 찾는 내 모습에 짜증도 났다. 나는 당장 코트를 찾아 입었다. 그녀에 대한 아쉬움 따위 깔끔하게 비워내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술 한잔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복수할지 제대로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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