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을 들어 찰랑이는 아드백 우가달을 목 안으로 털어 넣었다. 입안 가득 소독약을 뿌린 듯한 강렬함이 감돌았다. 나는 다른 향은 잘 몰라도 아마도 피트향이라 불리는 이 냄새만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사람들은 위스키의 다양한 향, 그러니까 보리, 바닐라, 오크, 과일, 꽃 향 등에 대해 떠들기를 즐겼다. 생산지와 생산과정에 따른 향은 물론이고 위스키의 떼루아라면 오크통이 아니겠냐며 오크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나는 구별이 잘 되지도 않거니와 금방 사라져버리는 냄새에 열중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청각이 제일 중요한 내 동료들, 그러니까 음악가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다. 어이가 없었지만 남들 앞에서는 나도 향을 즐기는 척했다. 외출 시 최고급 향수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게 사회생활이니까.
그런 내가 지금 굳이 위스키를 마시는 것은 마음을 냉정하고 깨끗하게 씻어버린다는 의미였다. 나는 무언가를 잊고 싶거나 화가 날 때면 위스키를 찾았다. 어린 시절 접한 토끼전에서 비롯된 정화의식 같은 거였다. 토끼가 간을 깨끗이 빨아 바위에 널어놓는 장면을 읽으며 사람도 온몸의 장기를 그렇게 주기적으로 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건 어려운 일이었기에 대신 택한 것이 어려서는 물, 성인이 되어서는 술이었다.
술 중에도 위스키를 택한 것 역시 이유가 있었다. 맥주나 와인과 달리 부패하지 않으며 코르크를 빼는 소리는 매우 청명했고 많은 사람이 향기롭다고 칭송해서 그런지 기품까지 느껴졌다. 특히 도수가 높고 강한 피트향으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에서 생산되는 위스키는 나의 원초적인 목적과 잘 맞았다. 나는 목구멍으로 흘려보낸 위스키가 내 장기를 뜨겁게 훑은 뒤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 다니며 소독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알코올의 뜨거움이 식고 나면 나를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 대해 남아있던 약간의 괜찮은 감정까지 다 날아가곤 했다. 당연히 그들을 짓밟을 방법도 더욱 잘 떠올랐다. 그러니까 나는 위스키를 마시며 나만의 짜릿한 의식을 수행하는 거였다.
눈을 부릅뜨고 빈 잔을 노려보았다. 수잔에 대한 좋았던 느낌까지 모두 쓸어내려면 술이 더 필요했다. 고개를 들었다. 버터는 벌써 얼굴이 발그레한 여자들 앞에 하이볼을 내밀고 있었다. 위스키 입문자라더니, 결국은 하이볼을 마셔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레몬과 허브까지 넣어 그럴싸하게 만든 버터의 솜씨에 두 여자는 눈을 빛내며 웃었다. 내 눈에는 녀석의 뒤통수만 보였지만 분명 여자를 후리는 표정일 것 같았다. 녀석은 그렇게 미끈덩 여자 둘의 마음에 들어갈 게 뻔했다. 나는 저런 놈들이 그냥 싫었다.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으려 노력하며 버터를 불렀다. 그는 몸가짐을 정돈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스트레이트로 더블 샷을 주문했다. 버터는 지거로 술을 정량한 뒤 능숙한 손놀림으로 내 잔을 채웠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하고 묻기까지 했다. 나는 무겁게 손을 들어 혼자 있고 싶다는 의사를 나타냈고 버터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여자들에게 돌아갔다. 그의 동작과 말투가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워 오히려 불쾌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꺼져. 어서 저 여자들이나 꼬드겨. 그러고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눈에까지 싸한 열감이 나며 눈물이 살짝 고였다.
나는 작은 키와 두루뭉술한 몸이 콤플렉스였다. 차라리 얼굴이 못났으면 성형이라도 할 텐데 사지 연장술은 부작용의 위험이 무척 크다고 했다. 쉽게 살이 찌는 체질이라 다이어트 역시 어려웠다. 대신 나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연습하며 화려한 경력을 쌓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다. 그 덕에 많은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다만 성에 차는 여자는 쉽지 않았다. 처음 만났던 날의 수잔도 내게 차가웠다. 나는 굳게 믿어왔다. 그래봤자 잡기 전이 피곤할 뿐 일단 잡은 여자의 마음을 다루기란 쉬운 일이라고. 소위 연인 관계를 끝내는 것도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 그런데 수잔으로 인해 그게 헝클어질지도 몰랐다. 수잔 따위로!
수잔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시립교향악단의 연말 시민 공연에서였다. 나의 순서 바로 전에 내 첼로 연주의 반주를 맡았던 피아니스트가 교통사고로 올 수 없게 되어 다른 사람을 급히 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 없었지만 서둘러 투입된 피아니스트의 실력이 미덥지 않았고 그 때문에 내 연주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짜증이 났다. 나의 날카로워진 신경은 그녀의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면서야 누그러졌다. 뜻밖에도 우리는 오랜 시간 함께한 파트너인 양 서로 자연스러운 미소를 주고받으며 연주했고 많은 박수도 받았다. 그날 연주한 곡은 사티의 ‘난, 널 원해(Je te Veux)’였다. 너의 입술은 나의 것이 되고, 너의 몸은 나의 것이 되고…….
공연이 끝난 뒤, 나는 마침 공연장을 나가려는 그녀를 발견했다. 얼른 다가가 곤란한 상황에 와주어 고맙다고 인사했다. 내가 이름을 묻자 그녀는 수잔이라 불러주세요, 하며 미소를 지었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가 꽤 보기에 좋았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나보다 키가 십 센티는 더 컸고, 몸매는 매우 날씬하면서 균형이 잡혀 있었다. 예의상 통성명이나 하려 한 거였지만 그냥 헤어지자니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함께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는지 물었다. 그녀는 선약이 있다며 부드럽지만 도도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연주가 끝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허기졌다.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먹으려고 근처 베이커리로 갔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혼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있었다. 선약이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거짓인 것 같았다. 자존심이 상해 그대로 나가려 했지만, 태연한 그녀의 모습이 아무래도 괘씸했다. 어쩌면 이건 아름다운 여자를 손아귀에 쥘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달려왔다면 그녀는 아직 변변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력은 갖추었으되 성공을 위한 끈이 부족한 여자. 더구나 알량한 거짓말로 내게 약점까지 잡힌 상태였다. 나도 모르게 한쪽 입가가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 앞으로 가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 흠칫 놀랐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이 갑자기 취소되었네요, 하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녀의 뻔뻔스러운 반응이 가소로우면서도 귀여웠다. 공손한 목소리로 자리를 같이해도 되겠는지 물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앉자마자 그녀의 우아한 외모와 피아노 연주 실력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추앙받는 자의 숨길 수 없는 자만으로 반짝였다. 나는 그녀의 블라우스 아래로 슬쩍 보이는 반듯한 쇄골도 눈여겨봤다. 옷을 벗겨 전체 모습도 낱낱이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짐짓 정중하게 대했다. 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라면 뜸을 들이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었다.
우리는 그로부터 며칠 뒤 다시 만났다. 나는 일부러 일찌감치 가서 예약해 둔 자리가 잘 보이는 구석에 숨듯이 앉았다. 곧이어 그녀가 나타났다. 약속 시간을 십여 분 앞두고 도착한 걸 봐서 늦지 않으려 신경을 쓴 것 같았다. 그녀는 공연이 있던 날보다 훨씬 공들인 화장을 했으며, 날씬한 허리를 강조하는 원피스를 입었는데 하이힐이 아닌 플랫슈즈를 신고 있었다. 지난 만남 뒤로 그녀가 나에 대해 알아봤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커리어에 꽤 쓸모 있을 거라 여겼을 테고 비로소 나에게 매달리고 싶어졌을 거였다. 그녀가 맵시를 확인하려는지 화장실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나는 예약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뒤 돌아온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 그녀의 뒤통수를 보며 속으로 조롱했다. 당신 머리에 어떤 계산을 품고 있든 상관없어, 당신이 뛰어봤자 나는 당신 위를 날고 있을 테니.
예상대로 그녀는 지방의 작은 대학교 음대를 나와 인맥이 부족했다. 나는 대화를 나누는 중 일부러 나의 학력과 인맥을 은근하게 과시했고, 그녀는 애교와 감탄을 섞어 내가 기다렸던 문장을 읊조렸다. “대단하세요. 저도 명문 음대를 다니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다음은 그녀의 동정심을 유발할 차례였다. 그러면서 가벼운 유머 감각도 드러내야 했다. “대단히 키가 작죠. 그래서 수잔 씨 같은 애인도 없나 봅니다. 데이트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제 생일이거든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일 축하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키야 조금 작으면 어떠냐고, 베토벤과 슈베르트 역시 크지 않다고도 했다. 잠시 뒤,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상체를 내 쪽으로 숙이고 생일 선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답은 정해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애인이 되어줄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보다 너무 쉬워 허탈했지만 그래도 감격에 겨운 척 입을 크게 벌렸다.
우리는 그날 밤을 함께 보냈다. 나는 졔띄뵈(난, 널 원해. Je te Veux), 하고 속삭이며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연주하듯 애무했고, 그녀는 훌륭한 악기처럼 진동했다. 그녀는 숨 가쁜 관계가 끝난 뒤 내게 소곤거렸다. 다음 생일에는 크게 파티를 열자고, 친구도 많이 부르라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주겠다고. 그 전에 우리 관계가 깨진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하는 앙큼한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자상한 목소리로 보답하듯 말했다. 내 곁에 머문다면 음악가들의 모임에 많이 데리고 다니겠다고, 당연히 함께 연주할 기회도 많아질 거라고, 그러면 내 친구가 다 당신의 친구가 될 테니 다음 내 생일은 당신에게도 즐거운 파티가 될 거라고. 그녀는 드디어 원하는 것을 얻은 양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나는 그게 우리의 거래이자 약속이라 믿었다.
나는 내친김에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거기까지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나는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하다며 얼른 사과했다. 침대 밖이라면 할 수 없는 말까지 속삭였다. 당신이 마치 내 손에 익은 섬세한 악기 같아서 항상 옆에 두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라고. 그녀는 부드럽게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역시 침대에서나 할 수 있는 대답을 했다. 악기의 소리는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요, 당신의 악기가 되어 기뻐요, 하고. 그러고는 쑥스러운 듯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나는 다시금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고 그녀는 웃음 섞인 비명을 질렀다. 역시 격 떨어지게 계속 추근대느니 한발 물러서는 게 나았다. 며칠 더 노력하면 충분히 승산 있는 게임이 될 것이었다.
수잔은 당연히 그녀의 본명이 아니었다. 수잔 발라동을 좋아해서 수잔이라는 가명을 쓰는 거라 했다. 공연 때 갑자기 투입되어서도 능숙하게 반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곡이 사티가 수잔 발라동을 위해 만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그녀의 실력을 과대평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실망스러웠다. 심지어 그녀는 발라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발라당, 벌러덩, 훌러덩 이런 표현이 생각나지 않느냐는 말을 지껄였다. 그러면서 걸치고 있던 가운을 서슴없이 젖히고 누워 다리를 벌렸다. 그녀의 실없는 말과 상스러운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싶기도 했다. 그저 그녀의 활짝 열린 허벅지 사이를 만끽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의 몸은 예상보다도 훌륭했다. 내 기분에 따라 무슨 옷을 입히든 그녀는 능히 소화했다. 예전엔 눈길도 주지 않던 많은 사람이 그녀와 붙어 다니는 나를 흘끗거리며 바라봤다. 나는 그녀에게 여러모로 정성을 쏟았고 가끔은 아이처럼 졸라대기까지 해서 기어코 그녀를 내 집에 들어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신체가 아름다운 사람들의 주변에는 그들을 탐내는 자가 많을 터였고, 그녀 역시 매력적인 외모라는 특권을 이용해 숱한 유혹을 즐기며 살아왔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걸 차단하고 있다는 데 묘한 우월감도 느꼈다. 그녀가 토플책을 펴놓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 것 역시 흥미로웠다. 그녀는 나의 외국 유학 생활은 어땠는지 상세히 묻곤 했다. 유학을 갈 처지도 아니면서 뭐 하러 그러는지 우스웠다. 그래도 그녀로부터 동경의 눈빛을 받을 때면 꽤 흐뭇해져서 일부러 어려운 어휘를 섞어가며 그녀의 질문에 답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