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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작가 imkylim Nov 27. 2024

초단편_길

  저는 장미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돌보던 장미예요. 네? 어린 왕자가 B612에 무사히 도착했느냐고요? 여러분은 어린 왕자에게만 관심이 있군요. 이해해요. 누구는 그가 뱀에게 물려 죽은 거라 하고 또 다른 누구는 B612로 돌아간 거라 하니까 궁금할 거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까지 데리고 왔더군요.


  예전 모습 그대로냐고요? 흠, 글쎄요.


  그나저나 제 이야기를 먼저 좀 들어주시겠어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시는군요. 어린 왕자의 장미는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하다더니 역시, 하고 생각하는 거죠? 맞아요. 그러니까 질문만 할 거면 가던 길 가세요. 이봐요, 그렇다고 양 팔짱을 끼고 입 삐죽거릴 필요까진 없잖아요. 아, 들어보겠다고요? 좋아요,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어린 왕자의 근황도 알려드릴 테니 여기 편하게 앉으세요.      


  어린 왕자가 B612를 떠났던 날부터 시작해 볼까요? 그날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그는 평소와 달리 목에 장식이 있는 흰옷에다 노란 벨트를 하고 별 모양 견장을 단 푸른 외투까지 걸쳤어요. 부츠를 신고 손에는 날렵한 검도 들었지요. 평소보다 훨씬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어딘가 단호하고 낯선 느낌도 들었어요. 저를 떠나려 한다는 걸 눈치챘지요. 서둘러 고백했어요. 내가 어리석었다고, 용서해 달라고, 사랑한다고.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어요.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지요. 하지만 떠나기로 한 계획을 바꿀 생각은 없어 보였어요. 자존심이 상하더군요. 왜 떠나는 건지, 언제 돌아올 건지 묻지도 않았어요. 도리어 얼른 가라고 다그쳤지요.


  그는 정말 훌쩍 떠나더군요. 믿기지 않았어요. 저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지요. 식물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마치 굳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고요.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어요. 붙잡을 걸 그랬나, 그에게 친절하게 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했어요. 어린 왕자가 철새를 타고 날아간 길만 하염없이 쳐다봤어요.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길 기도했고 작은 소리만 들려도 번번이 놀라 두리번거렸어요. 


  멀찌감치서 어린 왕자를 처음 봤던 때가 떠올라요. 작은 씨앗이었던 저는 허공을 맴돌며 정착할 곳을 찾고 있었답니다. B612는 여러 후보 행성 중 하나였어요. 아니, 유력한 후보지였지요. 왕자는 금빛 곱슬머리에 하얗고 갸름한 얼굴, 호기심 가득한 눈을 가졌죠. 게다가 웃는 모습은 얼마나 예쁜가요. 그를 발견한 순간부터 내내 지켜봤어요. 행성도 야무지게 잘 관리하더군요. 하지만 왕자가 저를 사랑할 거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행성이 너무 작아서 살기에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어요. 망설이고 또 망설였죠.


  어린 왕자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구경하던 날, 저는 마음을 정했어요. 그가 몹시 쓸쓸해 보였거든요. 저 역시 오랜 시간 홀로 떠돌았지요. 외로운 처지의 우리는 단짝이 될 수 있을 거라 짐작했어요. 그건 무척이나 중요한 선택이었어요.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쉽사리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떨리는 마음으로 B612의 흙으로 파고들었어요. 


  그도 저를 사랑해야만 했어요.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잖아요. 그가 저에게 꼼짝 못 하게끔 길들여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우선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꽃 피울 준비도 한참을 했지요. 출발은 좋았어요. 어린 왕자가 제 아름다움에 감탄했거든요. 그래도 안심할 수가 없었어요. 특별해 보이고 싶어서 허영을 부리고 가탈스럽게 굴었어요. 저를 조금이라도 더 봐주길 바랐거든요.


  제 방법은 좋지 않았나 봐요. 어쩌면 왕자는 쓸쓸한 게 아니라 혼자 있는 걸 좋아했는지도 모르지요. 정성스레 보살피던 행성까지 버리면서 저를 떠난 걸 보면요. 제가 조급하고 어리석었다는 건 인정해요. 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였잖아요. 누구와도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요. 그에게 향기와 아름다움을 주는 것, 그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지요. 그는 그걸 몰라줬고요.


  어린 왕자를 내내 기다렸어요. 그에게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고 또 보냈어요. 오늘은 꽃잎이 한 장 떨어졌다고, 바람이 분다고, 또 기침이 난다고, 화산이 꿈틀거린다고, 바오바브나무가 더 자라서 내 자리까지 침범할 것 같다고, 가시가 하나 더 돋았다고……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어요. 제 마음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그가 돌아오길 바랐어요. 그런데 그 길이 길어지는 만큼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보이더군요. 


  대신 원망하는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B612의 흙에는 바오바브나무의 씨가 많아요. 그걸 알면서도 가버린 어린 왕자가 원망스러웠어요. 홀로 사는 별에서 왕자라니,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혼자 무슨 상상을 하든 상관없기야 하지만 스스로 왕자라고 칭하다니요. 그는 못 말리는 자기애에 푹 절어 있던 거죠. 더군다나 제가 좀 못되게 굴었다고 얼른 떠나버리는 속 좁은 왕자라니. 그런 소갈딱지로 뭘 하겠나, 평생 외로워만 하다 생을 마감하라고 저주를 퍼붓기도 했어요. 마침내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애정을 품지 않겠노라 다짐했어요. 어린 왕자가 떠난 방향을 노려보며 욕설도 마구 쏘아댔지요. 못난이, 쪼다, 멍청이.


  어처구니없게도 더는 기다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뒤에야 그가 돌아왔어요. 그는 행성에 발을 딛자마자 저에게 달려왔어요. 저는 눈물이 맺히는 걸 꾹 참고 일부러 가시를 곤두세우며 고개를 돌렸어요. 사실은 무척 반가웠어요. 고생했는지 조금 야윈 모습이 안타까웠고요. 하지만 그를 보고 제 가슴이 설레어 뛰는 게 어쩐지 분했어요. 분명 마음을 닫겠다고 다짐했었으니까요. 하필 몸단장도 하지 않았을 때 와서 숨고 싶기도 했고요. 더군다나 그는 양이 든 상자도 가지고 왔더군요. 아무래도 저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나 봐요. 저는 왕자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왠지 섭섭하고 심술이 나더군요.


  어린 왕자는 제가 썩 반기지 않아서 그랬던지 얼버무리듯 말했어요. 보고 싶었어요. 많이 생각했고요. 그러고는 묵묵하게 일을 시작했어요. 아무리 잘 정돈하고 떠났을지라도 그가 한참 비운 행성은 엉망이었거든요. 분화구를 청소하고 크게 자란 바오바브나무 뿌리를 뽑아서 치웠어요. 나무가 조만간 제 자리까지 차지할 지경이었는데 정말 다행이었지요. 작은 나무를 먹고 있는 양에게 장미는 먹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기도 했어요. 


  앞서 말했듯이 저는 어린 왕자를 사랑한 적이 있어요. 그 역시 그랬겠죠. 다만 표현 방식이 서툴렀고 서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잘 몰랐기에 어려웠고 끝없이 혼나는 기분이었어요. 사랑해도 서로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인 거죠. 그가 돌아왔을지라도 이미 상처받은 제 마음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었어요. 저 혼자 어찌할 수 없었던 행성에 왕자가 돌아와 관리해 주니 고마운 일이라고만 여기기로 했어요. 제 안에 남은 자그마한 사랑의 씨앗은 깊숙이 숨겨 두었어요. 어차피 너무 늦어 소용없을 테니까요…….    

 

  여러분 표정이 어두워졌군요. 그때를 떠올리니 갑자기 목이 메어 잠시 쉰 거예요.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그는 변했더군요. 저와 문제가 생겼을 때 도망치듯 행성을 떠난 어린 왕자였잖아요. 돌아온 뒤로는 제 옆에 나란히 앉아 해가 뜨고 지는 걸 쳐다봤어요. 여행 중에 있던 일도 조곤조곤 들려주었어요. 제가 간혹 심술을 부려도 가만히 기다려주었지요. 안정감이랄까요, 그런 게 깃들어 있었어요.


  변한 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전에 어린 왕자를 옆에 붙들어두고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그를 길들이려 했지요. 하지만 왕자가 여행 중에 만난 여우 이야기를 들으며 길들임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여우가 이렇게 말했대요. 친구가 필요하다면 참을성 있게 길들여야 한다고. 길들임이란 속박이나 권력이 아니라 마음과 자리를 나눈다는 의미 같았어요. 또 이런 말도 했대요. 길들인 것에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다고. 그 낱말이 부담스러워 곱씹어봤어요. 그리고 사랑이란 책임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죠.


  제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 바라보는 어린 왕자를 보며 그의 쓸쓸함을 읽었듯이 그는 제 향기를 맡으며 제 안에 깃든 사랑을 읽었어요. 쪼그라들었다고 여겼던 사랑이라는 씨앗도 부풀기 시작했어요.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심각했던 문제는 따져보니 별 게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가 사랑했던 꽃이 하필 가시를 가진 장미고, 제가 사랑했던 왕자가 철새를 보면 마음이 유독 뒤숭숭해지는 것뿐이었어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기에 완전히 달랐던 거죠. 당연한 사실을 왜 진즉 몰랐던 걸까요.


  자, 이제 알겠지요? 제가 여러분의 어린 왕자가 예전 모습 그대로냐는 질문에 얼른 답하지 않은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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