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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작가 imkylim Nov 20. 2024

버뮤다의 시간 4화_완결

  양손으로 거친 내 얼굴을 비볐다. 분리해 놓은 시계 부품들이 마치 내가 조각조각 흩어놓은 아내의 마음인 양 느껴졌다. 나의 계속된 의심에 영민하게 움직이던 아내의 동작이 둔해지고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던 게 생각났다. 어느덧 내 이름에서 우주를 연상하던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싶은 반짝임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우울해 보였다. 아내가 망가진 거였다. 하지만 고장 난 물건을 고칠 때와 달리 나는 아내의 변화를 애써 외면했다. 내 곁에 붙들어 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면서. 덥수룩한 머리 깊숙이 양손을 집어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올랐다. 나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아 잘 모르지만 그들 사이에는 문제가 있었다. 꽤 미인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 밖에 나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딱 한 번, 억울하다는 듯 나를 붙들고 호소한 적이 있었다. 어쩌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놀러 다닐 뿐이라고, 그것조차 못하게 하면 어쩌냐고. 그랬는데 아버지는 어느 날 시장에서 어머니에게 음흉한 눈길을 던지는 사내를 본 날, 이성을 잃은 듯했다. 어머니와 다투다가 주먹도 휘둘렀다. 결국 어머니 뺨에 커다란 상처를 냈다. 그 뒤로 어머니는 집에 머물렀지만 대신 아버지와 자주 싸웠다. 그런 아버지가 감히 넓은 우주를 상상하며 내 이름을 범우로 지었을 리는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 있었던 일도 기억났다. 처음 만났던 날 내 이름을 우주라 해석했던 아내는 부쩍 우주에 관심이 가는가 보았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빅뱅 이론과 양자적 평행우주론에 대해 보고는 내게 달려와 재잘댄 적이 있었다. 우주는 정말 넓은 것 같다고, 게다가 평행우주론이 맞는 거라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또 다른 우주에도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빅뱅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평행우주는 처음 들어보는 낯선 용어였다. 그런 나를 보며 아내는 범우 씨, 평행우주가 진짜 있어? 자기는 우주니까 알지 않아? 하며 내 옆구리를 찔러 간지럼을 태웠었다. 나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평행우주가 뭔지는 몰라도 그 이론대로라면 내 곁에 아내가 있는 바로 이 우주에 살고 있다는 게 좋았다.


  나는 아내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나와 아내가 함께 지내는 다른 우주를 찾아내 거기로 간다면 어떨까, 하고 상상했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그 우주에 내가 둘이 되는 거니까. 대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봤던 ‘백 투 더 퓨처’라는 영화 때문인지 그게 오히려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내게 그런 특수 차량은 없을지라도 시계는 많으니 크라운을 돌려 시간을 앞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상황을 마음속으로 그려봤다. 그럼 나는 아내가 바다로 떠나던 일요일의 전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우리는 아내가 바다에 다녀오고 다음 날인 월요일에 가정법원을 가기로 했었다. 나는 자존심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서류를 제출하고 가지게 될 숙려기간 동안 우리 사이에 변화가 있기를 바랐다. 이혼 앞까지 가서야 관계를 돌아본다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그런 외부적 압박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나도 나를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아내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조금은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내가 잘못을 시인하기를 기다렸다. 무겁게 흐르는 시간 속에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 내내 결백을 주장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내가 증거만 잡으면 순순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럼 나는 너그러운 척 아내를 용서하고 안아주면 될 텐데.


  사실 그 일요일에 아내를 굳이 바다에 나가게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내가 싫어해 한동안 못 간 곳이었다. 하필 전날, 어떤 여자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옆에서 들어보니 해양 봉사 때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아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확인할 기회라 여겼다. 짐 싸는 걸 미뤄 별거를 하루라도 늦게 시작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 마음에 까짓 해양 봉사 다녀오라고 호기롭게 말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언제나 내 입을 커다란 스테플러로 박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말 대신 이혼 서류 따위 집어치우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고만 했어도!


  아내가 죽은 뒤, 어쩌면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가 온 건 아닐까, 죽는 순간까지 나를 원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더군다나 영원히 함께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나의 비겁함에 원통했다. 더욱 비겁했던 건 아내의 장례식에 아내와 가까이 지내고 있던 남자가 나타날 거라 기대했다는 점이었다. 분명 유별나게 애통해하는 남자가 있을 거라 여겼다. 눈을 부릅뜨고 장례식에 참석한 남자들을 살폈다. 소용이 없었다. 아내는 성격 좋은 아주머니이자 좋은 친구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었다. 인정해야 했다. 죽은 아내를 불륜녀로 낙인찍어 나의 죄책감이나마 덜어내려고 했던 나는 속된 말로 찌질한 놈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 년이 다 되도록 가슴속에서 아내를 보내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일 거였다. 행복하게 해 주지도 못한 주제에 염치 없이. 아내의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힘없이 뜬 눈 사이로 꺼내놓은 시계 부품들이 들어왔다. 아까는 갈가리 찢어진 아내의 마음처럼 보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다르게 보였다. 날렵하게 둥글고 뾰족하기도 한 유려한 모양새가 바다의 조각들 같았다. 물결치는 파도, 바위, 갈매기와 펠리컨, 이름 모를 다양한 어류와 해초. 아내가 아끼던 것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것들이 얼른 다시 조립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듯 느껴졌다. 나는 심호흡한 뒤 윤활유를 보충하고 각 부품을 순서대로 제 자리에 넣었다. 간만이라 그런지 손이 조금 떨렸기에 예전보다 더욱 신중하게 움직였다. 덮개까지 조립한 다음 다시금 깊은숨을 내쉬었다. 크라운을 돌리자 멈춰있던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계를 귀에 가져다 댔다. 재깍재깍. 그 소리를 들으며 아내가 온전하게 지내고 있길 빌었다. 아내가 말해준 평행우주론이 맞는다면 아내는 넓은 우주 어딘가에 살고 있을 테니까.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자 작업실 너머 벽에 걸린 시계들이 눈에 들어왔다. 멈춰있거나 시간이 제멋대로인 모습이 갑자기 불편했다. 흠잡을 데 없는 세상이라 여겼던 시계가 온통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불현듯 내 주변까지 모호하고 일그러진 듯 느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시계를 내려놓고 양손을 비빈 뒤 이마에 가져다 댔다. 팔꿈치를 작업대 위에 내려놓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숨을 내쉬었다. 여러 시곗바늘 소리가 섞여 귓가로 들어왔다. 불규칙한 그 소리가 점점 크게 울리며 제각각 다른 곳을 가리키는 시곗바늘의 모습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느닷없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이 떠올랐다. 바닷가에 누운 오리인지 물개인지, 혹은 꾹 감은 눈인지 알 수 없는 녀석과 각기 다른 시간에서 멈춘 듯 녹아내린 시계가 인상적인 작품.


  갑자기 그 그림은 각자가 자신의 특정한 시간 속에 멈춰버린 세상을 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속 모호하면서 쓸쓸해 보이는 녀석이 어쩐지 나인 양 느껴졌다. 그렇다면 내 위에 녹아내린 시계는 어디에서 멈췄을지 궁금했다. 얼핏 내가 아직 아이였던 때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어머니를 짓누르던 아버지의 시간을 그대로 이어받아 나 역시 결국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 게 아닐지. 그런 아버지를 두지 않은 우주에서 살았더라면! 순간 누군가 내 머리를 세게 후려치고 지나간 듯 머리가 아팠다. 내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좀 쉬고 싶었다. 작업실 불을 끄고 시계를 다시 손에 쥔 채 이 층으로 올랐다. 물이라도 마시려고 정수기 앞에 섰는데 주방 벽에 붙은 세계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지도 앞으로 다가갔다. 아내는 지도를 사서 붙인 뒤 버뮤다 위에 작고 빨간 별을 그려놓았다. 결혼 전부터 언젠가 꼭 같이 가자고 했으면서도 결국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당장 여행 계획부터 세울 텐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간을 흐르게 하라던 꿈속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시간을 흐르게, 시간을 흐르게……. 퍼뜩 평행우주를 운운하던 날, 아내가 했던 다른 말도 기억났다. 중첩된 가능성의 상태로 있던 양자적 우주가 나의 선택으로 인해 어떤 길을 택하게 된다고, 그러니까 내게 다가오는 미래는 내 선택에 따라 무수하게 달라질 수 있는 우주라고,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며 다른 평행우주를 꿈꾸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그저 바로 앞에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게 현명하다고.


  아내가 TV 프로그램에서 들은 말을 전하던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 앞에서 움직이는 아내 모습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당시를 떠올리자, 어쩌면 아내는 어리석은 나를 일깨워주려 꿈을 통해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못나게 군 걸 아버지 탓으로, 내 마음이 초조했던 걸 아내 탓으로 돌렸던 나. 더군다나 거기에 멈춰 점점 작게 웅크리고만 있었던 나를 일으켜 세워주려고. 가슴이 덜컥이며 아려왔다.


  주방에서 나와 방으로 향했다. 두터운 암막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문도 열었다. 어느새 깊은 밤이었다. 새삼스럽지만 하늘은 끝도 없이 넓었다. 하늘 너머 알 수 없는 지점까지 펼쳐졌을 우주는 또 얼마나 광대할까. 문득 나의 우주가 나만을 위한 작은 방이었다면 아내의 우주는 넓디넓었을 것 같았다. 한참을 서서 창밖을 바라보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카펫을 깔아둔 바닥까지 하늘에서 쏟아지는 희끄무레한 빛이 닿아 있었다. 나는 바닥에 놓인 옷가지들을 옆으로 밀쳐놓고 아내의 시계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대로 카펫에 누웠다. 아내와 나란히 누워있던 때가 떠오르며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시에 눈물이 흘러 양쪽 귀에 고였다. 창밖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결은 다소 습했지만 시원했다. 구름 걷힌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줄기가 내 몸 위에 곱게 내려앉았다. 아내가 나를 내려다보며 가볍게 쓰다듬어주는 것 같았다.


  믿고 싶었다. 아내와 나는 여전히 무엇으로든 연결되어 있다고. 나는 내 옆에 뉘어 놓았던 아내의 시계를 창밖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시계 양쪽으로 밤하늘 가득 별이 보였다. 빛나는 하늘 너머 아내가 그린 버뮤다 위의 별과 꿈속에서 본 물고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듯했다. 눈을 감고 깊이 심호흡했다. 순간 나를 둘러싼 우주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묵직한 파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끝)


이렇게 묵직하게 많은 상품을 보내줄 줄이야. ㅎ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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