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아침 산책은 카피올라니 공원이 아닌 서쪽 비치 쪽으로 잡았다. 해변 모래밭을 따라 분홍으로 유명한 로얄 하와이언 호텔까지 갔다. 1927년에 개관한 오성급 럭셔리 호텔로 거의 백 년간 와이키키를 지키고 있었다. 와이키키가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에는 카메하메하 1세의 저택이 있었고, 현재 리조트를 둘러싼 코코넛 숲에는 카아후마누 여왕의 궁전이 있었다고 한다. 건물 외벽부터 호텔 앞 파라솔, 선베드, 비치타월까지 온통 핑크였다. 언뜻 유치하게 보이는 분홍이건만 이렇게도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건 왕족의 공간이었다는 역사가 주는 특별함 때문 아닌가 싶었다.
되돌아가는 길에는 모래밭이 아닌 산책로 쪽으로 걸었다. 지나치며 봤던 고풍스러운 빅토리아 양식의 호텔 앞에 섰다. 안내문이 있었다. 와이키키의 퍼스트레이디라는 별명이 있다는 모아나 서프라이더였다. 1901년에 개장한 와이키키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로, 미국 국립 사적지로도 등재되었다고 한다. 오픈 시 하룻밤 숙박비는 1.5달러로,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 1달러 내외였다고 하는데 하와이의 상황을 고려하면 상당한 고급 호텔 가격이었다고 한다. 나는 하얀 난간과 너른 층계를 보며 긴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신사복 차림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조심스레 계단 오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호텔과 건너편 쇼핑센터, 정갈한 매장 앞에는 바닥을 쓸고 호텔 입구를 청소하고 배달 트럭에서 물건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과일 껍질, 음식물 쓰레기, 떨어진 잎사귀, 플라스틱 컵, 빈 유리병, 관광 안내지, 테이크아웃 용기 등이 섞인 커다란 봉지도 보였다. 지난밤 흔적으로 악취를 풍기는 곳도 있었다. 얼룩진 보도블럭을 청소하느라 물 뿌리는 손길도 분주했다. 화려한 호텔을 감싸는 간밤의 악취와 쓰레기가 온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디론가 옮겨지는 거였다. 그렇게 치워진 공간 위로 깔끔한 러닝복 차림의 새벽 운동족들과 서프보드를 든 사람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본인이 이 대자연에 버린 것들에 대해 모르는 척하는, 말끔하게 치워진 공간에 만족하는 사람들.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 땀도 식힐 겸 카피올라니 공원 초입의 반얀트리 아래 짙은 그늘로 들어갔다. 가방을 열어 그림 도구를 꺼냈다. 바람도 약하고 두 번째라서 그런지 전날보다 훨씬 느긋한 기분이었다. 닭이 내 옆을 지나가며 땅을 헤집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핑크니 퍼스트레이디니 하는 환상을 지나 호놀룰루라는 현실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반얀트리에 무수한 낙서와 도려낸 자국이 또 눈에 들어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연은 말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데 우리 인간은 거기에 참으로 많은 환상과 흔적을 씌운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