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CAMERA, BUT...

by 괜찮은 작가 imkylim

호오말루히아 식물원, 말이 식물원이지 구역별로 스리랑카, 필리핀, 아프리카, 폴리네시아 등 세계 여러 열대 지역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커다란 숲 수준이었다. 면적은 400에이커(48만평)에 달하고 주차장도 곳곳에 많은데 입장료는 무료였다. 식물원에 진입하면서부터 코올라우 산맥과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높은 나무들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와이어로 호오말루히아가 평화를 준다는 뜻이라던데 웅장한 모습에 마음이 들떴다.


불현듯 작가 이금이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이 생각났다. 일명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건너간 주인공 버들의 남편 태완은 카후쿠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는데, 거기에서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우뚝우뚝 날칼진 코올라우 산상’이 보인다 했다. 바로 그 코올라우 산맥이었다. 괜히 소설로 들어간 듯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주차장에서 내려 걷다 보면 각종 식물이 그야말로 풍성하게 펼쳐지는데, 방문자 센터 근처에서 봤던 윤기 도는 붉은 줄기를 뽐내던 sealing wax palm, 이름처럼 요염하던 분홍색 sexy pink가 인상적이었다. 다들 카메라를 들고 있기에 나도 슬그머니 찍었지만, 사진을 찍어도 될지 망설여졌다. 들어가는 길에 카메라 금지 표시 그림이 있는 표지판을 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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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타고 지나가느라 NO CAMERA OR MOBILE PHONE까지 읽었다. 하지만 어째서 사진을 못 찍게 하는지 의아했다. 혹시 이 식물원이 한국에 덜 알려진 이유는 사진을 못 찍게 해서인가? 그렇지만 더 안으로 들어가니 점점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무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규칙을 어길 리는 없는 것 같았다. NO CAMERA OR MOBILE PHONE 뒤에 이어진 문구가 뭐였을지 궁금했다. 다른 주차장으로 이동하던 중 문제의 표지판을 또 만났다.


NO CAMERA OR MOBILE PHONE PHOTOGRAPHY ON OR NEAR THE ROAD. 길이나 길가에서 찍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물원에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도로 풍경이 당장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싶게 했었다. 하지만 너도나도 길 한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는다면 무척 위험하니 금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듯했다.


한 주차장에는 셔츠를 풀어젖힌 건장한 남자가 빨간 지프 위에 앉아 있었다.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각도를 달리해가며 그의 사진을 찍었다. 이내 둘이 역할을 바꾸겠지 싶었다. 그곳이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는 사진의 성지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앞부분만 읽고 사진을 못 찍는다고 착각했다니. 나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지만 어떤 언어인들 그렇지 않을까 하며 민망한 마음을 웃어넘겼다.


들떴던 기분은 식물원 안쪽으로 걸어갈수록 평화로워졌다. 수풀 너머 너른 잔디 앞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얼핏 햇빛 비치는 수면 위아래로 주황색 무리가 일렁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오리 몇 마리와 머리에 혹이 있는 주황색 코이 잉어가 그득 있었다. 길이는 대략 이삼십 센티 정도. 자기가 자라는 환경의 크기만큼 성장한다는 ‘코이의 법칙’의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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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는 작은 어항에 두면 5cm, 큰 연못에 두면 25cm, 강물에서는 100cm에 달하는 대어로 성장한다고 한다. 코이가 물의 양이나 깊이에 따라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기 때문이라는데, 잠재적 성장 능력이 환경에만 좌우되는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와 열대의 동식물이 다른 것처럼 진화와 발달도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졌으니까 일리가 있었다.


설핏 표지판에서의 내 오판이 떠올랐다. 한 줄 문장도 다 읽지 않고 덜컥 결론부터 내렸던 나. 인간에게 있어서 환경이라는 게 꼭 물리적 환경만 뜻하는 건 아니다. 코이가 물의 양에 따라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듯 인간의 뇌는 새로운 정보와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자극에 따라 새로운 연결을 만드는 인지적 성장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섣부른 판단, 제한된 정보만을 바탕으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도 작은 어항이나 마찬가지였다. 좁은 시야에 갇힌 사고방식 자체가 성장을 가로막는 심리적 환경이니까.


내가 지금까지 문장 일부만, 혹은 사건 일부만 보고 판단한 뒤 틀에 갇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하니 아득했다. 내가 만든 어항 속 코이는 치어 수준일 것만 같았다. 나는 소망한다. 여행과 일상 속에서도 내 사고의 어항을 연못으로, 강물로 점점 확대해 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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