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차에 올라타 72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사워솝과 코코넛을 맛본 것으로는 배가 채워지지 않았다. 눈앞의 아름다운 해안선보다 간절한 건 밥 한 끼였다. 도시락을 싸 와야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 맥도널드가 눈에 들어왔다. (맥도널드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몇몇 식당이 있지만 당시에는 몰랐다) 직원의 알로하와 함께 햄버거를 받았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창에 붙은 메뉴 포스터를 봤다. 거기엔 스팸, 에그 스크램블, 밥을 한 접시에 담은 메뉴가 있었다. 아침 정식 메뉴쯤 되는 듯했다. 맥도널드에서 빵이 아닌 밥을 파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여기도 스팸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와이에서 먹어보라는 추천 메뉴 중에는 스팸 무스비가 있다. 기대한 건 아니지만 포트데루시 해변에서 놀 때 한 번쯤 먹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무스비 카페에 줄을 섰다. 딱 예상했던 맛이었다. 김밥에 길들어 그런지 재료는 턱없이 적고 밥만 많아 목이 메었다. 야채가 거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무스비 중에 그나마 아보카도가 든 걸로 골랐지만 가늘게 한 조각이었다. 게다가 랩에 꽁꽁 싸맨 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왜 다들 랩이 깨끗할 거라고 믿어버리지?)
하와이인은 매년 스팸잼(Wakiki SPAM JAM) 축제도 연다. 스팸잼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적에는 스팸으로 설마 잼까지 만드나? 했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된 스팸 요리를 맛보고 즐기는 문화행사였다. 무스비 외에도 많은 음식에 스팸을 활용할 정도로 스팸을 사랑한다고 한다. 맥도널드 아침 메뉴를 포함해 로코모코의 햄버거 패티 대신 구운 스팸을 쓰기도 하며, 타코나 포케, 볶음밥, 면 요리의 토핑으로도 자주 들어간다고. 그래서인지 스팸 종류도 많다. 여행 중에 내가 코스트코와 무스비 카페에서 직접 본 스팸은 이와 같다.
SPAM Classic
SPAM less soduim
SPAM GOCHUJANG(고추장)
SPAM with TOCINO(토시노: 파인애플 주스로 재운 달콤한 돼지고기라고 함)
SPAM TERIYAKI
SPAM with real Hormel bacon (Hormel은 미국의 식품 기업)
SPAM HOT & SPICY
클래식은 물론, 저염 버전, 고추장 맛, 테리야키 맛, 베이컨이 들어간 것, 그리고 ‘토시노’라 불리는 달콤한 돼지고기 버전까지. 마트에 가서 작정하고 살폈다면 더 많은 종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Hormel은 1937년에 스팸을 출시했는데, 이 제품이 잘 팔리지 않는 돼지 어깨살의 판매를 늘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spiced ham의 약자라는, 혹은 shoulder of pork and ham이라는 추측도 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군인들에 신선한 고기를 공급하기 어려웠기에 스팸이 매 끼니 올라갔다고 한다. 여러 군인이 불만을 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아무튼 전 세계에 퍼진 만큼 스팸은 단순한 가공육이 아니라 문화적 영향도 미쳤다. 스팸이 노래 제목으로, 장난스러운 하이쿠 형태의 Spam‑Ku로도 활용되었고, 영국의 코메디 그룹 몬티 파이선은 스팸송을 부르기도 했다. 원치 않는 광고성 메시지나 이메일을 스팸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가 되긴 했지만, Hormel측에서는 몬티 파이선을 지지했다고 한다. 아마도 기업 홍보의 수단으로 좋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와이에 스팸이 대량으로 배급된 것도 제2차 세계대전 때다. 그 과정에서 현지인의 식탁에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흘러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하와이의 스팸 소비량은 세계 일 위라고 한다. 신선한 채소와 해산물, 열대과일 등 먹을 것이 넘치는 하와이에서, 왜 사람들은 여전히 통조림 속 스팸을 좋아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익숙해서? 편해서?
한국에도 미군의 흔적은 남았다. 미군 부대에서 남은 각종 햄과 통조림, 치즈 같은 식재료가 김치, 고추장, 라면 등과 결합해 탄생한 음식이 바로 부대찌개다. 하지만 오늘날 부대찌개는 ‘가끔 생각나는 음식’일 뿐, 하와이의 스팸 무스비처럼 위세 높은 음식은 아니다. 전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가공육의 현재가 한국과 하와이에서 완전히 다른 셈이다.
문득 무스비가 초밥 모양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스팸은 현지 주민뿐 아니라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야 했던 일본계, 필리핀계, 한국계 이민자들이 더불어 나누기에 더없이 좋았는지 모른다. 그들은 기운 내 일해야 하므로 밥은 많이, 그것도 빠르고 간편하게 먹어야 했다. 단백질이 될 회는 상할까 염려되는 상황에서 빚어낸 것이 스팸 무스비 아닐까. 그렇다면 거기에는 조화와 인내라는 알로하 스피릿이 녹아들어 있었을지 모른다. 조금 너그러운 마음으로 천천히, 스팸 무스비를 음미할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