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던 중, 도로변에서 과일 파는 천막을 봤다. 바로 옆에 먹을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둥근 것도, 심장 모양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에 연둣빛 껍질, 그리고 표면에는 뾰족한 가시까지 박힌 사워솝이었다. 나머지 일행은 코코넛을 골랐다. 얼굴이 가무잡잡한 아저씨가 사워솝을 반으로 뚝 자른 뒤 햄버거 포장에 쓸법한 용기에 담더니 숟가락과 함께, 그리고 코코넛은 윗부분을 자르고 빨대를 꽂아서 건네주었다.
사워솝은 섬유질이 많았다. 파인애플을 숟가락으로 긁는다면 사워솝 푸는 느낌과 가까울 듯했다. 먹다가 숟가락이 부러지기도 했지만 점점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잘 긁어먹었다. 맛은 뭐랄까, 파인애플에 망고와 사과를 섞은 느낌이었다. 가운데 심 부분은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S가 한입 먹더니 약간 바나나 맛이라며 권했다. 입에 넣어봤다. 단단하고 달지 않은 바나나 같았다. 코코넛은 빨대로 물 부분을 다 마신 다음에 반으로 잘라 안쪽의 배젖까지 남김없이 긁어먹었다. 마카푸우 트레일에 다녀온 뒤라 출출했던 터라 그 단맛이 입에 착 감겼다.
그렇게 열심히 과일을 해치우는데, 넉넉한 풍채의 아저씨가 트럭에서 내렸다. 망설임 하나 없이 쌓여있는 코코넛 중 하나를 집어서 칼로 툭 자른 뒤 먹기 시작했다. 저 아저씨는 돈도 안 내고 먹는군. 친구인가? 직원인가? 하는 궁금증이 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그는 턱을 살짝 올리며 씩 웃었다.
“I am an owner.”
아이쿠야, 주인이었구나. 달콤한 과일로 기분도 부드러워진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나눈 웃음을 떠올리니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포트데루시 해변 근처의 Beach walk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관광 안내 스탠드에 쌓여있는 지도가 탐나서 그쪽으로 갔다. 거기에 선 아저씨가 지도를 건네며 어디에서 왔냐고 묻기에 한국이라고 답한 정도가 첫 대화였다. 우리는 바로 근처 거리의 벤치에 앉아 무스비와 음료를 먹었다.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이층버스가 지나갔다. 저런 거 타고 다니면서 관광해도 괜찮겠네, 차비는 얼마일까, 그런 대화를 나누는데 버스 뒤꽁무니에 크게 적혀 있었다. FREE RIDE. 엥? 무료라고? 그런 고급 정보를 몰랐다니 정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타보자, 자세히 알아보리, 하는 마음으로 다시 관광 안내 스탠드로 갔다. 저 핑크색 트롤리는 어딜 다니는 거냐고 묻자 아저씨는 지도를 펼쳐 노선을 설명해 주었다. 금액은 하루에 6달러. 버스 뒤에 FREE RIDE라고 적혀 있는 걸 봤다고 하자, 아저씨가 말했다. 일본 브랜드의 부자들이 쓰는 신용카드가 있으면 무료라고.
아저씨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부자냐고 물었다. I am not rich, 라는 내 대답에 그는 이렇게 수정해 주었다. not rich enough. 나의 표현보다 섬세하고 유머러스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말을 즉각 받아들였다. Right, I am not rich enough. 그는 나를 보며 흰 치아를 가득 드러내고 웃었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접하는 농담은 내가 직접 겪는 여행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한 기념품이다. 농담은 낯선 이와의 경계 틈에 우리라는 공감대를 밀어 넣는다. 'I am an owner'의 호탕한 웃음이나, 'not rich enough'로 수정된 유머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선 통쾌한 소통의 순간이었다.
유머는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때로는 약간의 자기 비하를 통해 오히려 인간적인 친밀감을 드러내는 고도의 기술이다. 무뚝뚝한 사실(돈이 없다)을 예리하고 부드러운 유머(충분히 부자가 아니다)로 매만져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상황을 일순간 유쾌한 교류로 승화시킨 것이다.
관광의 묘미는 이런 소박하고 따뜻한 교류의 순간에도 숨어 있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낯설지도 않은 거리감. 그 적당한 친절과 유머가 만들어주는 웃음이야말로 여행의 후식 같은 순간이다. 그리고 가끔은 본식보다 후식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